요나는 왜 다시스로 도망했을까
요나는 왜 다시스로 도망했을까|선지자의 불순종과 인간의 편견
서론|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를 택한 이유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의 악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요 1:3). 이 선택은 단순한 여행 계획의 변경이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 늦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요나는 왜 이렇게까지 도망했을까요? 요나서 4장은 그 이유를 직접 알려 줍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재앙을 거두실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요 4:2).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몰라서 도망한 것이 아니라, 그 긍휼이 원수의 도시 니느웨에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도망했습니다. 다시스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서 멀어지려 했던 요나의 마음이 향한 방향이었습니다.
니느웨와 다시스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습니다
요나의 출발점이 된 욥바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입니다. 오늘날의 텔아비브 남쪽 해안 지역과 연결되는 곳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인근,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주변 지역에 있었으며, 이스라엘에서 보면 동북쪽 방향에 자리합니다. 반면 다시스는 정확한 위치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지중해 서쪽 너머의 아주 먼 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오늘날 스페인 남부 지역의 다르테소스와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 장소 | 이스라엘에서 본 방향 | 요나서 안의 의미 |
|---|---|---|
| 욥바 | 서쪽 해안 | 도망을 시작한 항구 |
| 니느웨 | 동북쪽 | 하나님의 명령과 사명의 방향 |
| 다시스 | 서쪽, 지중해 너머 |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는 방향 |
다시스의 정확한 위치를 어느 곳으로 보든 중요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이며, 요나가 당시 갈 수 있는 가장 먼 서쪽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기 인생의 배를 돌렸습니다.
이 지리적 대조는 요나서의 영적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일어나 다시스로 갑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성읍을 향해 말씀을 보내십니다. 요나는 그 원수의 회개 가능성에서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방향의 반대는 마음의 반대를 보여 줍니다.
요나는 두려워서만 도망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를 두려워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와 연결된 큰 성읍이었고,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에게 강한 위협이 된 제국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원수의 도시 한가운데 들어가 심판을 외친다는 일은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의 도망에는 개인적 안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가 밝히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만이 아닙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요 4:2).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과 이스라엘에게는 필요하지만, 앗수르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 점에서 요나의 불순종은 단순한 비겁함보다 더 깊은 문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고백했지만, 그 자비가 원수에게 향할 때에는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은 감사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변화하고 용서받는 것은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면서도, 은혜의 대상을 내 판단과 감정으로 제한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다시스로 향한 길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길이었습니다 (요 1:3)
요나서는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고 기록합니다 (요 1:3).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시스에는 계시지 않고 니느웨에만 계신다고 요나가 믿었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요 1:9). 그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사명적 책임 앞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낯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관계를 뜻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자체를 부정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장소를 찾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예배와 기도, 신앙의 언어를 유지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구하시는 순종은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화해하라는 말씀, 정직하라는 말씀, 사랑하라는 말씀, 책임지라는 말씀은 외면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찾았고, 배삯을 내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길이 순조롭게 열렸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불순종의 길에도 배가 있고 자리가 있으며, 잠시 평안한 바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쉽게 풀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는 계속 내려갔습니다 (요 1:3-5; 2:6)
요나서 1장은 요나의 움직임을 반복해서 “내려감”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욥바로 내려가고, 배에 내려가며, 배 밑창으로 내려가 잠듭니다 (요 1:3, 5). 이후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합니다 (요 2:6).
여기서 “내려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라드(יָרַד)입니다. 지리적으로는 항구로 내려가고 배의 아래 공간으로 내려간 것이지만, 문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는 영적 하강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지만, 요나는 계속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명과 순종의 방향으로 사람을 일으키지만, 불순종은 점점 더 깊은 고립과 어둠으로 사람을 끌어갑니다.
불순종은 처음부터 파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단지 불편한 임무를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도망은 폭풍을 불러왔고, 함께 탄 선원들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했으며, 자신을 죽음 같은 바다 깊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죄는 결코 개인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회피와 침묵, 거짓과 고집은 관계와 공동체에 파장을 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하강보다 더 깊이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죽음에서 보존하시고, 그 깊음에서 다시 기도하게 하시며, 육지에 토해 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내려간 깊음보다 더 깊습니다.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저항한 요나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요나를 단순히 편협한 사람으로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앗수르는 실제로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에게 위협이었고, 훗날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라는 비극에 깊이 연결됩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개인적 미움뿐 아니라, 민족적 상처와 두려움, 폭력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상처를 이해하시면서도, 그 상처가 하나님의 긍휼을 제한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을 보셨고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악을 선하다고 부르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멈추게 하시며, 죄인이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원수 사랑은 불의를 묵인하거나, 위험한 관계로 무조건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 범죄의 피해자에게 안전과 보호, 진실한 책임을 요구하지 않은 채 용서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 긍휼은 피해를 덮는 태도가 아니라, 악을 드러내고 멈추게 하며, 가해자가 진실하게 회개하도록 부르는 사랑입니다.
요나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되, 하나님께서 회개와 변화의 길을 여시는 사람을 완전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악도 보시지만, 원수 안에 있는 생명도 보십니다.
다시스의 배 위에서도 찾아오신 하나님
요나는 니느웨를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지만, 하나님은 그 배 위에서도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멈춰 세우셨고, 이방 선원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요 1:4-16).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에서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요나의 도망마저 사용하여 선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십니다.
이 사실은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도망은 죄였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패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망친 상황에서도 구원의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선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다가 잔잔해진 뒤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때로 잘못된 선택의 결과 속에 갇힌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이제 끝났다”고 말하며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도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스의 배 위에도 하나님은 계셨고, 물고기 뱃속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망친 자리에서도 찾아오셔서 회개와 회복의 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결론|반대 방향에서 다시 하나님의 길로
첫 번째|요나의 다시스행은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 방향을 택한 도망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동북쪽에 있었고, 다시스는 서쪽 지중해 너머의 먼 세계를 상징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반대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때 이처럼 마음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내 발걸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는지, 아니면 불편한 순종을 피하는 다시스를 향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요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원수에게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도망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게으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았고, 그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내 기준으로 제한하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도 회개와 회복의 길을 여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 번째|불순종의 길은 사람을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요나는 욥바로, 배로, 배 밑창으로, 바다 깊음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는 길은 결국 영혼을 고립과 무감각으로 이끌며, 때로 공동체에도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음 속에서도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갔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다시 돌아갈 길을 구해야 합니다.
네 번째|하나님은 다시스의 배 위에서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바다와 폭풍, 물고기를 통하여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망보다 크시며, 실패보다 깊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망치는 죄인을 찾아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스의 방향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니느웨의 길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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