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26의 게시물 표시

요한복음 5:16 - 5:30 안식일 논쟁

  안식일 논쟁을 넘어 아들의 권세로, “생명과 심판”이 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 짐이 있고 질문이 있어도, 말씀 앞에 서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정돈하시고 살리십니다. 오늘 본문(요 5:16-30)은 베데스다 치유 사건(요 5:1-15)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장 농밀한 자기계시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고(요 5:16),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선언하심으로 논쟁을 ‘규정’에서 ‘정체성’으로 끌어올리십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며, 그 이유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요 5:18)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9-30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생명 수여, 심판의 위임, 영생의 현재성과 부활의 미래성, 그리고 자신의 순종적 판결을 체계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안식일의 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믿음이란 무엇을 붙드는지’를 성경신학적으로 붙들며, 표면의 종교를 넘어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박해가 시작된 이유, “안식일”은 핑계이고 본질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 5:16). 사건의 표면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한 마디가 불씨를 크게 키웁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박영선 목사님은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의 시비가 “안식일에 어찌 이런 일을 하느냐”에서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로 이어지며 논쟁의 핵심이 곧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자리로 비약된다고 정리합니다. 즉, 안식일은 논쟁의 입구이고, 아버지 호칭은 논쟁의 중심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격렬해졌습니까? “유대인...

요한복음(John) 5:1 - 5:15 베데스다 연못 치유

  은혜의 집에서 들려온 한마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삶이 복잡해도, 말씀 앞에 서면 주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요 5:1-15)은 예루살렘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한마디로 치유되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요 5:5-9). 그런데 요한은 이 기적을 단지 ‘치유의 감동’으로만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표적은 안식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요 5:9-12), 유대인들의 형식주의를 드러내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생명을 주시는 주, 참 안식의 주—를 더 깊이 밝히는 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베데스다”(은혜의 집)라는 이름과 그곳의 절망,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요 5:6), “자리”(κραβάττον, 크라바톤)를 들고 걸어가라는 명령(요 5:8), 그리고 성전에서의 경고(요 5:14-15)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구원임을 붙들고자 합니다. 절망이 눌러앉은 은혜의 집, 베데스다의 아이러니 본문은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니라”(요 5:1)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길에서 한 장소를 주목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요 5:2). ‘베데스다’는 전승적으로 “은혜”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회복과 위로가 넘칠 것 같은데, 실제 풍경은 정반대입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요 5:3) 있습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간판 아래, 절망이 눌러앉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이상한 소문과 기대가 떠돕니다.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니”(요 5:3)라는 분위기입니다. 어떤 자료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

요한복음(John)4:43 - 4:54 가나의 기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다

  “말씀만 믿고 가더니” 표적을 넘어 말씀으로 서는 믿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의 피로와 마음의 무게를 안고 오셨더라도, 말씀 앞에 서면 주님이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요 4:43-54)은 사마리아에서 ‘말씀으로’ 믿음이 자라난 뒤(요 4:41-42),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이 가나에서 “두번째 표적”(요 4:54)을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왕의 신하가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간청하고(요 4:47),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하시며 믿음의 본질을 찌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들이 살았다”(요 4:50)라는 말씀을 붙들고 돌아간 그 사람의 믿음이 온 집의 믿음으로 확장됩니다(요 4:53). 오늘 설교는, 표적을 요구하는 마음이 어떻게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숙하는지, 그리고 요한이 왜 이 사건을 “가나의 두 번째 표적”로 묶어 복음의 구조 안에 배치했는지 살피며, 우리 역시 ‘보아야 믿는 신앙’에서 ‘말씀을 믿고 가는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돕고자 합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환영 속에 숨어 있는 오해 본문은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요 4:43)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증거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 4:44). 얼핏 보면 갈릴리에 가시면 환영을 받으실 것 같은데, 주님은 오히려 ‘고향에서의 불신’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요 4:45)라고 합니다. 즉 환영은 있는데, 그 환영의 근거가 ‘말씀’보다 ‘보았던 일’에 있습니다(요 4:45). BST 주석은 갈릴리의 환영이 외관상 열렬해 보이지만, 예루살렘에서 본 기적과 영향력 때문에 생긴 반응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예수님의 48절 말씀(표적 없이는 믿지 않음)이 ...

요한복음(John)4:27 - 4:42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간 사람, 추수의 기쁨으로 사는 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뜨거운 한낮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더 이상 자기 갈증만 붙들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요 4:27-42)은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증언하는 장면(요 4:28-29), 제자들이 “잡수소서”라 권할 때 예수님이 “나의 양식”을 말씀하시며 추수의 시각을 열어 주시는 장면(요 4:31-38),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직접 만나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는 장면(요 4:39-42)으로 이어집니다. 요한은 이 연속을 통해 ‘오해를 교정하는 방식’과 ‘무대의 교체’를 사용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와 복음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선명히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고 말하는 증언자의 자리로, 그리고 “눈을 들어 밭을 보라”(요 4:35) 하시는 주님의 추수의 마음으로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제자들의 시선과 여인의 결단, 물동이를 버려두는 회심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요 4:27)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워합니다. 유대인의 관습, 경계, 체면, 오랜 편견의 틀에서 보면 ‘유대인 랍비가 사마리아 여자와 길게 대화한다’는 건 낯선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러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요 4:27)입니다. 이상히 여기면서도 묻지 않습니다. 마음은 동요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자리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때 여인이 보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 4:28). 성도 여러분, 여기 “물동이를 버려 두고”가 회심의 상징처럼 박힙니다. 이 여인은 원래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물동이를 붙잡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목적이 바...

요한복음(John) 4:15 - 4:26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숨겨진 목마름을 드러내시고, “내가 그라”로 채우시는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쁜 일상과 복잡한 마음을 품고 오셨을 텐데,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오늘 본문(요 4:15-26)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을 내게 주사”(요 4:15)라고 청할 때, 예수님이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하시며 삶의 진실을 드러내시고, 이어 예배의 본질을 “신령과 진정”(요 4:23-24)으로 새롭게 가르치신 뒤, 마침내 메시아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면입니다(요 4:26). 오늘 우리는 ‘왜 주님이 상처를 건드리시는지’, ‘예배는 왜 장소 논쟁을 넘어서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우리 목마름의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함께 붙들겠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을 빛 가운데 두실 때가 은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론은 “내가 그라” 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물을 내게 주사” 표면의 갈증에서 깊은 갈증으로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아직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생활의 편의로 이해합니다. 매일 정오에 우물까지 와야 하는 수고, 사람들의 시선, 반복되는 피곤이 사라지길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요청을 가볍게 받아 넘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표면의 욕구를 들어 올려, 존재의 바닥에 있는 갈증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첫 반응이 의외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레슬리 뉴비긴은 이 대목에서 “감춰진 것이 빛 앞에 놓인다”고 말하며, 주님의 요청이 갑작스러운 전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인의 삶 전체를 살리기 위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편하게만 해 주시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갈증을 숨기는...

요한복음 강해 4:1 - 4:14

  야곱의 우물에서 열린 하늘의 선물, 생수를 주시는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모인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고(요 4:3-4),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를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요 4:7-14). 이 이야기는 단순히 ‘전도 대화법’의 모범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선물로 주시는지, 그리고 인간의 목마름이 어디에서 해결되는지를 성경신학적으로 드러내는 복음의 핵심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의 신학적 필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깊은 담, 그리고 “생수”(ὕδωρ ζῶν, 휘도르 존)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πηγή, 페게)이 되는지(요 4:14)를 함께 묵상하며, 주님이 주시는 참 만족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복음의 길은 피하지 않는 길입니다 본문은 의외의 이유로 시작합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요 4:1-3). 예수님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여기의 “하여야”는 헬라어로 흔히 ‘반드시’의 뜻을 가진 표현(ἔδει, 에데이)의 뉘앙스를 지니며, 단순한 지리적 최단거리라기보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피할 수 없는 필연’으로 읽히곤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구절을 두고, 지리적 필요를 넘어 신학적 필연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며,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결국 온 세계로 확장되는 흐름을 이 대목에서 예고한다고 해설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의 길은 늘 “통행하여야” 하는 길입니다....

[매일성경 묵상 본문] 2026년 3월 요한복음 9장~18장

요한복음 묵상 본문   3월 1일 / 요한복음 9:1 - 9:12 3월 2일 / 요한복음 9:13 - 9:23 3월 3일 / 요한복음 9:24 - 9:41 3월 4일 / 요한복음 10:1 - 10:21 3월 5일 / 요한복음 10:22 - 10:42 3월 6일 / 요한복음 11:1 - 11:16 3월 7일 / 요한복음 11:17 - 11:27 3월 8일 / 요한복음 11:28 - 11:37 3월 9일 / 요한복음 11:38 - 11:46 3월 10일 / 요한복음 11:47 - 11:57 3월 11일 / 요한복음 12:1 - 12:11 3월 12일 / 요한복음 12:12 - 12:19 3월 13일 / 요한복음 12:20 - 12:33 3월 14일 / 요한복음 12:34 - 12:43 3월 15일 / 요한복음 12:44 - 12:50 3월 16일 / 요한복음 13:1 - 13:17 3월 17일 / 요한복음 13:18 - 13:30 3월 18일 / 요한복음 13:31 - 13:38 3월 19일 / 요한복음 14:1 - 14:14 3월 20일 / 요한복음 14:15 - 14:21 3월 21일 / 요한복음 14:22 - 14:31 3월 22일 / 요한복음 15:1 - 15:17 3월 23일 / 요한복음 15:18 - 15:27 3월 24일 / 요한복음 16:1 - 16:15 3월 25일 / 요한복음 16:16 - 16:24 3월 26일 / 요한복음 16:25 - 16:33 3월 27일 / 요한복음 17:1 - 17:16 3월 28일 / 요한복음 17:17 - 17:26 3월 29일 / 요한복음 18:1 - 18:11 3월 30일 / 요한복음 18:12 - 18:27 3월 31일 / 요한복음 18:28 - 18:38

요한복음 강해 3:22 - 3:36 세례요한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한다

  신랑의 음성을 기뻐하는 교회,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예배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각자의 형편이 다르지만, 말씀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갈급함으로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요 3:22-36)은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전환점에서, 세례 요한이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를 정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의 비교와 경쟁의 마음이 일어나는 자리에서(요 3:26),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고 고백하고,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며(요 3:29), 마침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로 신앙의 본질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31-36절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월성과 복음의 결말—영생과 진노—를 선포하며 3장을 ‘잠금’처럼 마무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의 경쟁을 내려놓고, 신랑이신 주님을 기뻐하며, 진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교가 시작될 때, 마음이 무너집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요 3:22). 그리고 “요한도 살림이라 하는 곳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요 3:23)라고 합니다. 두 사역이 한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는 듯 보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덧붙여(요 4:2),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고, 도구는 제자들’이라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요한의 제자 중에서 어떤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요 3:25). 정결예식 논쟁이 불씨였지만, 곧바로 본질은 ‘비교’로 바뀝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언하신 이가 세례를 베...

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3월 다섯째주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만물을 붙드시고, 계절의 문을 여닫으시며, 작은 씨앗 하나에도 당신의 지혜를 새겨 두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26년 3월 다섯째 주일 , 3월의 마지막 주를 맞아 봄의 기운이 한층 높아지는 이때에 우리를 주의 전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새싹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며,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굳은 마음도 녹이시고 생명의 새 일을 시작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예배가 형식의 껍질을 벗고, 성령의 숨결로 살아 움직이는 참된 경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먼저 지난 한 주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봄 햇살을 즐기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 너머의 창조주를 잊곤 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내 나라를 세우는 데 분주했고, 기도의 자리보다 염려의 자리에서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말씀 앞에 즉시 순종하기보다 계산하고 미루었으며, 사랑하기보다 판단했고, 섬기기보다 요구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교만과 무감각을 불쌍히 여기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성령의 빛으로 숨은 죄의 먼지를 드러내어 깨끗이 털어내게 하옵소서. 회개가 순간의 감정으로 그치지 않게 하시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제 간구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떠오르듯, 우리의 믿음이 상황의 기온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주의 약속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믿음이 지식의 창고에만 쌓이지 않고 순종의 발걸음으로 드러나게 하시며, 고난의 밤에도 말씀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옵소서. 어린 자녀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이 깊이 심겨 자라게 하시고, 청년들의 길에는 세상의 속도보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기준이 되게 하옵소서. 장년들에게는 가정과 일터의 무게를 감당할 새 힘을 주시고, 노년의 날들에는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소망과 평강을 더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도들의 건강 을 위해 기도합니다. 환절기의 변화 속에서 연약한 ...

2026년 11월 주일 대표기도문 모음 (주일 낮, 주일 오후)

 2026년 11월 주일 대표기도문 11월 주일 낮 대표기도문 11월 첫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계절의 주권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 해의 빛이 서서히 낮아지고 찬 기운이 마음 문틈까지 스미는 2026년 11월 첫째 주일(11월 1일) , 우리를 여전히 은혜의 자리로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낙엽이 제 자리를 비우며 땅을 덮어 다음 계절을 준비하듯, 우리의 마음도 자기 자랑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덮어 입게 하옵소서. 오늘 이 예배가 사람의 열심으로 꾸민 불빛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타오르는 하늘의 등불이 되게 하시고, 주께서 받으실 향기로운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는 지난 한 주간도 주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마음은 세상의 소음에 더 예민했고, 기도의 골방은 쉽게 비워 두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즉시 순종하기보다 계산하고 미루었으며, 경건의 모양은 지키되 능력은 부인한 때가 많았습니다. 은밀한 교만으로 다른 이를 판단했고, 작은 손해에도 원망이 먼저 솟구쳤으며, 받은 은혜를 당연한 듯 여기며 감사의 샘을 막아 버렸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변명하지 않게 하시고, 회개의 눈물이 마른 땅에 내리는 첫비처럼 마음을 적셔, 새 순종의 싹이 돋아나게 하옵소서. 이제 간구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11월의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도 뿌리가 깊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듯, 우리 믿음이 세상의 흔들림에 휘청이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와 말씀과 성도의 교제 위에 굳게 서서,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맺히게 하옵소서. 믿음이 감정의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시고, 약속의 말씀에 닻을 내려 “주께서 하셨다”는 고백으로 오늘을 견디게 하옵소서. 어린 자녀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청년들의 길 위에는 세상의 유혹보다 더 밝은 말씀의 등불...

매일성경 묵상, 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빛으로 오신 구원의 복음 요한복음 3:16-21은 기독교 복음의 심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깊이와 구원의 목적, 믿음의 본질과 심판의 원리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선포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구절이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 선언입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본문은 “나는 과연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빛을 거부하는 인간의 상태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 앞에서 어떤 태도로 서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단순한 암송 구절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방향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속사의 출발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한 문장은 복음의 정수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헬라어 ἠγάπησεν(에가페센)으로, 아가페 사랑을 가리킵니다. 조건적이거나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희생적이며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κόσμος(코스모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단순히 자연 세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 가운데 있는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세상이 아니라, 반역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냅니다. 사랑의 방식은 독생자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독생자”는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로, 유일무이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분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파견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선언은 창세...

요한복음 3:1-15 묵상 설교, 거듭남 인자의 들림,

  거듭남과 인자의 들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새 길 요한복음 3:1-15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거듭남의 본질과 인자의 들림이라는 구속사의 핵심 진리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한 밤중에 찾아온 종교 지도자와, 그에게 하늘의 비밀을 여시는 주님의 대화는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밝히는 계시입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본문은 “나는 과연 거듭난 사람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께서는 혈통이나 지식,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는 새 출생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광야에서 들린 놋뱀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구속을 예고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문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은혜와 십자가의 영광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지식에서 계시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소개로 시작됩니다. 니고데모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당대 종교 엘리트의 대표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하고,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찾아옵니다. “밤”이라는 시간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밤은 영적 어둠과 무지를 상징합니다. 니고데모는 지식은 있었지만 참 빛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하지만, 아직 그분이 누구이신지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선언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는 헬라어 ἀμὴν ἀμὴν(아멘 아멘)으로, 매우 중요한 선언 앞에 붙는 강조 표현입니다. “거듭나다”는 헬라어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겐...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2:13-25, 성전정화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2:13-25은 예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과, 이어서 예수 자신이 참 성전이심을 계시하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분노의 사건이 아니라 구약 성전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구속사적 전환을 보여 줍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형식에 머무르는지, 아니면 참된 관계 속에 있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성전이 상업화된 현실 속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 성전으로 세워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뜻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 하나님 임재의 본질을 회복하십니다 본문은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구속사적으로는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난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유월절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중요한 시간적 배경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즈음 성전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궁극적 유월절 어린양이심을 암시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십니다. 당시 성전에는 제사용 동물을 파는 시장과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필요했던 제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화되고 착취 구조로 변질되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여기서 채찍은 폭력적 분노의 표현이라기보다 예언자적 상징 행동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상징적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의 행동은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거룩성을 회복하려는 구속사적 ...

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2:1-12, 가나의 혼인잔치

  가나의 혼인잔치,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구속의 표적 요한복음 2:1-12은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 곧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의 본질을 드러내는 계시의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 기적을 “표적”(σημεῖον)이라고 부르며, 단순한 능력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삶의 결핍 속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새 언약의 기쁨을 이루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물과 같은 평범한 일상이 은혜의 포도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 인생의 빈 잔을 채우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혼인잔치의 결핍과 “내 때”의 선언, 구속사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제삼일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제삼일”이라는 시간 표시는 단순한 날짜 정보가 아니라, 성경 전체 맥락에서 중요한 신학적 상징을 지닙니다. 제삼일은 부활과 새 시작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호세아 6장에서도 제삼일에 우리를 살리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이 첫 표적 속에 부활과 새 창조의 그림자를 담아 놓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유대 사회에서 기쁨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종종 혼인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사야와 호세아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백성을 신부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혼인잔치는 단순한 가정행사가 아니라 언약적 기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는 기쁨과 축복의 상징입니다. 시편 104편은 포도주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기쁨의 상실, 언약의 기쁨이 고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이 상황을 알리고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중보적 요청입니다. ...

[매일성경 묵상] 요한복음 1:35-51 하나님의 어린양, 와 보라

  와서 보라, 따름과 계시로 열리는 제자의 길 요한복음 1:35-51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의 이야기로, 복음서 전체에서 제자도의 출발점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된 예수에 대한 인식이 개인적 만남으로 이어지고, 결국 제자의 삶으로 확장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본문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말씀입니다. 말씀 묵상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고 변화시키시는지 살피며, 우리 역시 말씀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통해 우리의 삶을 구속사의 흐름 안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 증언에서 따름으로 이어지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다시 예수를 가리키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언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앞선 본문에서 이미 어린양 선언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증언이 실제 제자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요한의 두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헬라어 ἀκολουθέω(아콜루데오)입니다. 단순히 뒤를 걷는다는 의미를 넘어 삶의 방향과 목적을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도는 단순한 동의나 호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묵상하는 성도에게 이 단어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수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복, 능력, 해결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랍비”는 히브리어에서 온 ...

[매일성경 묵상] 요한복음 1:19-34 광야의 소리,

  광야의 증언과 어린양의 계시, 구속사의 문이 열립니다 요한복음 1:19-34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구약의 약속이 신약에서 성취되는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을 보여 줍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으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결국 어린양 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도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마음을 정돈하는 묵상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구속사의 흐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성경 묵상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외치는 소리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정체를 묻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메시아 대망 사상이 강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고, 구약의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등장은 매우 강렬한 종교적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로, 히브리어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이며 기름 부음을 받은 왕, 곧 하나님의 구원자를 뜻합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기대를 철저히 거절합니다. 이어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라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이는 말라기서에 예언된 엘리야 재림 사상과 신명기 18장의 모세 같은 선지자 기대를 반영한 질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사야 40장 3절로 설명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여기서 “소리”는 헬라어 포네(φωνή)입니다. 소리는 메시지...

[매일성경 묵상] 요한복음 1:1 - 1:18 태초에 계신 말씀

  태초에 계신 말씀,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은혜와 진리 요한복음 1:1-18은 성경 전체의 문을 여는 장엄한 서문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신학적 선언이 아니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다시 묻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는 영적 나침반입니다. 태초 이전부터 계신 말씀, 빛으로 오신 생명,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 앞에 서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 속에서 창조와 구속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곧 구속사의 중심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 삶을 그 빛 아래 두고자 합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태초”는 헬라어로 ἀρχή(아르케)입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의 시작점이 아니라, 근원과 기원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창조 이전, 시간 이전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말씀”은 λόγος(로고스)입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우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이성적 원리를 가리켰고, 유대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계시적인 말씀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로고스를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인격으로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함께”라는 표현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대면적 관계를 뜻하는 πρός(프로스)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인격적 교제,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 선언은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되시나,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구속사의 출발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할 때, 단순히 교훈을 찾는 것이 아...

2026년 12월 셋째주 주일 대표기도문

주일 낮 대표기도문 12월 셋째주 대표기도문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026년 12월 셋째 주일, 성탄을 며칠 앞둔 이 거룩한 때에 저희를 주의 전으로 불러 모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분주해지고, 세상의 달력은 ‘끝’을 향해 서둘러 넘어가지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는 은혜로 우리를 붙드셔서 “주께서 오신다”는 소망 안에 서게 하십니다. 성탄이 가까이 오고(12월 25일), 다음 주는 2026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하오니, 주님 이 시절의 무게와 은혜를 함께 품고 주 앞에 엎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먼저 우리의 죄를 자복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한 해 동안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에도 우리는 감사보다 불평을 더 쉽게 말했고, 기도보다 염려를 더 오래 품었으며, 말씀보다 내 생각을 더 굳게 붙들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가까운 이들에게는 더 날카로웠고, 거룩을 말하면서도 작은 죄와 타협을 가볍게 여기며 스스로를 속였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질 때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더 간절히 붙들게 하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셔서, 이 예배가 연말의 습관이 아니라 회개의 새 출발이 되게 하옵소서. 성탄을 앞둔 이 시간에 우리가 다시 깨닫습니다. 주님은 높은 보좌에서만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길은 ‘더 높이, 더 빨리’를 외치지만, 주님의 길은 ‘더 낮게, 더 깊게’를 가르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눈물과 한숨과 상처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셨다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주님, 성탄이 장식으로만 남지 않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차가운 마음의 문턱을 넘어 따뜻한 사랑이 들어오게 하시고, 무뎌진 양심의 어둠을 비추어 주셔서,...

2026년 12월 둘째주 대표기도문, 성서주일

12월 둘째주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역사를 이끄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026년 12월 둘째 주일, 대림절의 길 위에서 저희를 주의 전으로 불러 주시고, 또한 성서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귀히 여기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하고 마음은 쉽게 흩어지나, 주님께서는 변함없는 말씀으로 우리의 길을 밝히시고,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등불을 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먼저 우리의 죄를 자복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한 해의 끝을 향해 가는 이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분주함을 핑계로 기도를 뒤로 미루었고, 말씀을 가까이한다 하면서도 정작 말씀 앞에서 마음을 낮추기보다 내 생각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입술로는 믿음을 고백하나, 일상에서는 염려가 믿음을 압도하고, 감사보다 불평이 앞섰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순종하기보다 판단하고, 적용하기보다 평가하며, 남을 향한 잣대로만 사용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오늘 예배가 회개와 회복의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대림절은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거룩한 시간인 줄 믿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 선명하듯, 세상의 혼란이 깊어질수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탄의 신비가 더 크게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낮고 작은 자리로 임하셔서 죄인들의 길을 함께 걸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의 기다림이 단지 분위기와 감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붙드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단정히 하시고, 마음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성서주일을 맞아 말씀의 은혜를 새롭게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종이에 갇...

2026년 12월 둘째주 주일 대표기도문

12월 둘째주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계절과 시간을 지으시고 그 경계를 정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12월 둘째 주일,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며 다시 주의 전으로 불러 모아 주셔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찬바람이 창가를 스치고 해가 빨리 기우는 이 계절에,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끝”을 바라보게 하시며, 동시에 “은혜의 시작”을 다시 붙들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날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릴 때가 많았으나, 주님의 손은 한 번도 우리를 놓지 않으셨음을 오늘 고백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먼저 우리의 죄를 자복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한 해 동안 주께 받은 은혜가 셀 수 없이 많았음에도, 우리는 감사보다 불평을 더 쉽게 말했고, 기도보다 염려를 더 오래 붙들었습니다.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도 급한 순간에는 사람의 방법을 먼저 택했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가까운 이들에게는 더 차갑게 굴었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쉽게 거칠어지고, 말이 쉽게 날카로워져 누군가의 심령을 상하게 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연말을 향한 이 시간이 회개와 정결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12월은 달력의 마지막 칸이 많아지는 달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께서 우리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세어 보이시는 달이기도 합니다. 지나온 열두 달의 길에는 환한 날도 있었고, 안개 낀 날도 있었습니다. 웃음이 풍성했던 계절도 있었고, 눈물이 깊었던 밤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 같았으나, 어떤 날은 기도가 메말라 입술에서만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 모든 날들 위에 변함없이 계셨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는 다시 길을 찾게 하셨고, 넘어질 때는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으며, 울 때는 말없이 곁에 서서 우리의 눈물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우리가 한 해를 돌아볼 때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