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4장 강해

나의 긍휼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크다|요나서 4장

서론|선지자의 분노와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

요나서 4장은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뒤, 요나가 크게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요나가 처음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는 니느웨의 회개 가능성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원수의 성읍에 임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한 요나에게 박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통해 그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요나는 하루 만에 자랐다가 사라진 박넝쿨 하나는 아까워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사는 니느웨에는 긍휼을 품지 못합니다. 요나서 4장은 끝내 요나의 대답을 기록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질문을 독자에게 남겨 둡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타인에게는 그 은혜가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완고함을 비추며, 하나님의 긍휼이 인간의 판단과 경계를 얼마나 넘어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불편해하는 요나의 분노 (요 4:1)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요 3:10). 그런데 그 일은 요나에게 “크게 싫었고” 그는 성을 냈습니다 (요 4:1). 이 표현에는 의도적인 언어의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요나서 3장에서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을 보셨고,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오히려 악한 일처럼 여기며 분노합니다.

히브리어 라아(רָעָה)는 악, 재앙, 해로움이라는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니느웨의 악도 라아로 표현되고, 하나님께서 내리지 않으신 재앙도 같은 계열의 표현으로 말해집니다. 그런데 요나는 재앙이 내리지 않은 일을 자기에게 큰 “악”처럼 느낍니다. 이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뒤집혀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일이 요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의처럼 보였습니다.

요나의 분노를 단순한 개인적 성격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실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앗수르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복되면 자기 민족에게 더 큰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분노에는 민족적 상처와 역사적 두려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상처와 두려움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긍휼보다 자기 감정을 더 크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벌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요나서 4장은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가, 아니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파멸을 바라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던집니다.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를 밝히는 요나 (요 4:2)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처음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던 이유를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요 4:2). 이 고백은 구약 신앙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과 성품을 계시하실 때 주신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자비는 고통과 비참함 속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가볍게 보신다는 뜻이 아니라, 즉시 멸망시키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애가 크신 분입니다. 여기서 “인애”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와 연결되며,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과 변함없는 긍휼을 뜻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은혜는 감사히 여기지만, 원수에게 향하는 은혜는 불편해합니다. 신학적으로 옳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요나는 보여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서, 그 사랑이 내가 정한 경계 밖으로 흘러가면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은혜를 받게 하신 분이시며, 다른 사람도 은혜 안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나를 낮추고 감사하게 해야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분노를 물으시는 하나님 (요 4:3-4)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요 4:3). 요나서 1장에서도 그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을 본 뒤에도 다시 죽음을 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망할 때에도 죽음을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뒤에도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말에는 깊은 실망과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심판이 임하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아 선지자로서 수치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이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정의감에 맞게 행동하시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즉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요 4:4). 이 질문은 요나서 4장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아시며, 그 분노가 어디에서 오는지 드러내도록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 자체를 정당화하지도 않으십니다. “네 분노가 참으로 옳은가?”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의로운 분노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품은 미움과 복수심을 감추려 합니다. 물론 불의와 폭력, 죄악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필요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죄를 향해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가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상처 입은 자아와 편견, 통제 욕구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정죄만 하시기보다, 그 분노의 뿌리를 드러내어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읍 밖 초막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요나 (요 4:5)

요나는 성읍 밖 동쪽에 자리를 잡고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그늘 아래 앉아 있습니다 (요 4:5). 니느웨는 이미 회개했고, 하나님도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아직도 어떤 심판이 일어날지 기다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정말 최종적인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요나가 성읍의 동쪽에 앉았다는 표현은 상징적 여운을 남깁니다. 그는 니느웨 안으로 들어가 회개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시 바깥에 머물며, 그들의 멸망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몸은 니느웨 가까이에 있지만 마음은 니느웨 사람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 말씀을 듣고 돌이킨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초막은 임시 거처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만든 작은 그늘 아래 앉아 성읍의 운명을 지켜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판단의 작은 그늘 속으로 숨어들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를 기뻐하기보다, 내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결과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회개하고 변화하기를 바라기보다, 결국 그 사람이 실패하여 내 판단이 맞았음을 증명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성읍 바깥에서 심판을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요나의 마음을 다루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니느웨만 회개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지자 요나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박넝쿨 아래서 크게 기뻐하는 요나 (요 4:6)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요나의 머리 위에 자라게 하시고 그늘을 만들어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십니다. 요나는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요 4:6). 여기서 “예비하다”는 요나서 1장에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히브리어 마나(מָנָה)는 하나님께서 정하여 마련하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뿐 아니라 박넝쿨, 벌레, 바람까지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자연과 환경, 크고 작은 사건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 식물을 박넝쿨로 번역합니다. 원문의 키카욘(קִיקָיוֹן)이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식물의 정확한 종류가 아니라 그 역할입니다. 이 식물은 뜨거운 햇볕 아래 있는 요나에게 잠시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와 완고함에 사로잡힌 요나에게도 필요한 쉼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지 못한다고 해서 당장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 요나서의 큰 기쁨은 니느웨의 회개나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에 생긴 작은 그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요나는 수많은 사람이 죽음에서 돌이킨 일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편안함을 더 크게 기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긍휼보다 자신의 작은 안락에 더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이 작은 기쁨을 이용하여, 그가 깨닫지 못하는 큰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과 애착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누리는 편안함과 유익에는 민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과 회복에는 무감각하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은혜는 나의 그늘을 지켜 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타인의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넓혀 갑니다.

벌레와 뜨거운 동풍으로 드러나는 요나의 마음 (요 4:7-8)

다음 날 새벽 하나님은 벌레를 예비하셔서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박넝쿨은 시들어 버립니다 (요 4:7). 이어 해가 뜨자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십니다. 해가 요나의 머리에 쬐니 그는 혼미하여 다시 죽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요 4:8). 물고기, 박넝쿨, 벌레, 동풍을 모두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요나의 영혼을 다루시는 교사이십니다.

“뜨거운 동풍”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매우 뜨겁고 건조한 바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단지 불쾌한 날씨가 아니라, 요나가 의지하던 작은 그늘이 사라진 뒤 그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환경입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가 생겼을 때 크게 기뻐했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분노합니다. 그의 기쁨과 절망은 하나님 자신보다 환경의 변화에 너무 크게 좌우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요나를 괴롭히기 위해 잔인하게 행동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말로는 이해하지 못할 진리를 삶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라는 큰 성읍의 생명에는 무감각했지만, 자신에게 유익을 주던 식물 하나에는 깊이 슬퍼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제한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넓은 긍휼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도 삶의 작은 상실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건강이나 재물, 사람의 인정, 익숙한 안정이 흔들릴 때 우리는 크게 낙심합니다. 그런 아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해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걸고 있는지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선물에 더 매달리고, 이웃의 생명보다 내 편안함을 더 크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고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박넝쿨 하나와 니느웨 십이만 명 (요 4:9-11)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네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요 4:9).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마음속에 있는 완고함을 드러내십니다. 요나는 자기 기쁨을 빼앗긴 일에 대해서는 죽을 만큼 분노하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할 수 있다는 일에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예로 드십니다. 요나는 그 식물을 위해 수고하지도 않았고, 자라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식물입니다 (요 4:10). 요나는 자신이 아무 공도 들이지 않은 식물을 아깝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을 아끼시는 것은 얼마나 더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고, 가축도 많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4:11).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라는 표현을 어린아이들만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도덕적 분별이 어두운 니느웨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생명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만 아니라 가축까지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의 작은 그늘에만 머물지 않고, 도시 전체의 생명과 피조 세계에까지 미칩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으로 끝납니다. “내가 어찌 니느웨 그 큰 성읍을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 4:11). 요나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는 독자가 그 질문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박넝쿨 같은 내 이익과 안락에는 민감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의 생명에는 무감각하지 않은가를 묻게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편견보다 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보다 넓습니다.

결론|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도록 부름받은 사람

첫 번째|하나님의 은혜를 내 소유물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을 정확히 알았지만, 그 은혜가 니느웨에 임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는 원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임하기를 바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은혜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긍휼을 통해 타인에게도 긍휼을 품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더 넓은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외면하지 않으시되, 그 뿌리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두 차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상처와 분노를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정직하게 살피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도 불의 앞에서 분노할 수 있지만, 그 분노 안에 복수심과 교만, 편견과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감정만 달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세 번째|내 작은 그늘보다 타인의 생명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가 시든 일에는 죽을 만큼 아파했지만, 니느웨 성읍의 수많은 생명에는 긍휼을 품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내 건강과 재물, 명예와 편안함에는 민감하면서도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불의에는 무감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요나의 좁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은 나만의 안락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고 생명을 살리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과 원수 된 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요나서 마지막의 질문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사람을 나도 아끼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사람을 나도 기다리며, 하나님의 긍휼이 향하는 자리로 기꺼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우리의 마음도 더 넓어져야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2026년 4월 26일

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2월 첫째주일

2026년 7월 첫째주 대표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