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2장 강해
깊음에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다|요나서 2장
서론|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감사의 기도
요나서 2장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죽음에 삼켜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은 요나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기도의 방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고통을 호소하는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지셨다는 감사와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요나는 깊음과 스올, 산의 뿌리와 구덩이라는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요나서 2장은 도망치는 선지자가 하나님께 붙잡힌 자리에서 다시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또한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귀는 열려 있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복음의 진실을 증언합니다.
물고기 뱃속이 기도의 자리가 되다 (요 2:1)
요나서 1장의 마지막에서 큰 물고기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서 2장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라고 시작합니다 (요 2:1). 이 짧은 문장은 요나서 전체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요나는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폭풍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방 선원들이 각자의 신에게 부르짖고, 선장이 요나에게 그의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할 때도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도망길이 막힌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즉시 육지로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물고기 뱃속이라는 깊고 어두운 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곳은 요나가 자신의 불순종과 무력함을 외면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고 도망할 수 있었고, 배 밑창에서는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는 달아날 길도, 의지할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방법도 없습니다. 요나는 마침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자리로 들어갑니다.
우리도 삶에서 물고기 뱃속과 같은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계획이 멈추고, 관계가 막히며, 자신의 힘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시간은 견디기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하심으로, 잊고 있던 기도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고난 자체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고난의 자리도 기도의 자리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는 넓은 성전 뜰이 아니라 물고기 뱃속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너무 어두운 곳은 없습니다.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들으시는 하나님 (요 2:2)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라고 고백합니다 (요 2:2). 여기서 “고난”은 단지 불편하거나 힘든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이 막히고 자신이 무너지는 듯한 절박한 곤경을 뜻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만든 위기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한 결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이어서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스올(שְׁאוֹל)은 구약에서 흔히 죽음의 영역, 사람이 생명의 세계에서 끊어진 것처럼 느끼는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요나는 실제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바다에 빠졌고, 물에 휩쓸렸으며, 큰 물고기에게 삼켜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산 사람의 세계에서 멀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올의 뱃속에서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성전 안에서 드리는 정돈된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자리,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오는 자리, 말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깊은 탄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시편은 여러 차례 깊은 곳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깊음보다 더 깊이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결과를 실제로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 더 이상 기도의 길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고난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깊은 곳에서 올리는 가장 낮은 목소리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파도와 깊음 (요 2:3)
요나는 자신이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고, 큰 물이 자신을 둘렀으며, 하나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자신 위에 넘쳤다고 고백합니다 (요 2:3). 흥미로운 점은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진 주체를 선원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실제로 요나를 바다에 던진 사람들은 선원들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사건 너머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는 단순히 “사람들이 나를 바다에 버렸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이 하나님의 손 밖에서 벌어진 우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난의 원인을 단순하게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고난의 세부 이유를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삶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라는 표현은 요나의 고난이 단순한 심리적 불안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을 압도하는 현실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파도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위협입니다. 물은 목까지 차오르고, 발붙일 곳은 사라지고, 방향을 잃게 합니다.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요나도 그 깊은 물결 속에서 자기 삶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파도를 “주의 파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고난을 미화하는 말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며, 삶의 혼돈이 그분의 통치를 넘어섰다고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말을 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답을 아는 상태가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깊음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일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난 듯해도 성전을 바라보다 (요 2:4)
요나는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요 2:4).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했고, 바다에 던져졌으며, 바닷속 깊음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절망 속에서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고백합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은혜, 죄 사함과 예배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요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이라는 가장 부정하고 비참한 장소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전을 바라봅니다. 이는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건물을 향해 몸을 돌린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다시 시선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자신이 얼마나 멀리 갔는가에 의해 막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전은 죄 없는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곳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성전이시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로움이나 공로를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요나의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고백은, 자기 절망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회개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산의 뿌리와 구덩이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요 2:5-6)
요나는 물이 자신의 영혼까지 둘렀고, 깊음이 자신을 에웠으며, 바다 풀이 자기 머리를 쌌다고 고백합니다 (요 2:5). 이어서 자신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이 그 빗장으로 자신을 오래도록 막았다고 말합니다 (요 2:6). 이는 바닷속 죽음의 세계를 매우 생생하고 시적으로 묘사한 표현입니다. 요나는 바다 표면의 폭풍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산의 뿌리라고 표현되는 깊은 심연까지 내려간 것처럼 느꼈습니다.
“땅의 빗장”은 죽음의 감옥을 떠올리게 합니다. 빗장은 문을 닫아 외부와 단절시키는 장치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갇힌 것처럼 느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 빗장을 열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 절망과 실패의 깊음은 사람에게 “이제 끝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의 삶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고, 과거의 잘못이 영원히 자신을 가둘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곧바로 놀라운 고백을 덧붙입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요 2:6). “구덩이”는 죽음과 멸망, 파괴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건지셨습니다. 요나의 구원은 그의 능력이나 지혜, 회피의 기술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이미 끝난 자리, 실패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도 하나님의 손은 닿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건지신다고 해서 죄의 결과가 가볍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나는 깊음까지 내려가 자신의 불순종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는 자를 영원한 파멸에 가두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덩이에서 건지셔서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피곤한 영혼이 여호와를 생각할 때 (요 2:7)
요나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사오며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요 2:7). 여기서 “피곤하다”는 말은 단순히 몸이 지친 상태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혼이 쇠약해지고, 힘이 다 빠지며, 더 이상 자신을 붙들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힘과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서 여호와를 생각합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얼마나 자주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고,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깊음과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자, 그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단순히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그분의 언약과 은혜를 의지하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는 성전에 이르렀습니다. 물리적으로 요나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바다의 깊음에 있고,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 곧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자리에는 공간의 장벽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장소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병실에서도, 낯선 도시에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방에서도, 마음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다만 요나의 기도는 단지 위기 탈출을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내 문제 해결의 도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입니다. 기도는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간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굳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헛된 우상과 버려지는 은혜 (요 2:8)
요나는 “우상 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라고 고백합니다 (요 2:8). 이 구절은 해석상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기서 “우상”은 문자적으로는 헛되고 공허한 것, 실체 없는 허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붙드는 모든 것은 결국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재물과 성공, 사람의 인정, 권력과 안전, 자기 계획과 통제력도 하나님보다 앞서게 되면 마음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와 연결됩니다. 헤세드는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과 변함없는 인애를 뜻합니다. 우상을 붙드는 사람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버리는 셈입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을 떠나,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요나에게도 아픈 말씀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우상숭배를 말하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민족의 안전과 감정, 자기 판단을 더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만 우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보다 내 상처와 편견을 더 붙들며, 하나님보다 내 통제력을 더 의지한다면 우리도 헛된 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상은 처음에는 우리를 지켜 줄 것처럼 보입니다. 돈은 안전을, 인정은 가치를, 통제는 평안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죽음의 깊음에서 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나쁜 행동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헛된 것을 붙들던 손을 놓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감사의 제사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고백 (요 2:9)
요나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요 2:9). 그의 기도는 단순한 위기 탈출의 요구에서 감사의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아직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의 상황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생명을 건지셨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받은 뒤에만 감사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구원의 한가운데서 감사의 제사를 약속합니다.
“서원을 갚겠다”는 말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응답하여 예배와 순종으로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서원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루어 주시면 내가 무엇을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거래적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서원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그 은혜에 마땅히 응답하겠다는 다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 2장의 중심 고백이 이어집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요 2:9). 이 짧은 문장은 요나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구원은 요나의 능력이나 선원의 노력, 배의 견고함이나 물고기의 힘에 속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요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고, 선원들도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폭풍을 멈추게 하시고, 물고기를 예비하시며, 요나를 살리십니다.
이 고백은 니느웨의 구원에도 적용됩니다. 요나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니느웨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대상을 인간이 제한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다시 육지에 선 요나 (요 2:10)
요나서 2장의 마지막은 매우 간결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 2:10). 하나님은 요나에게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큰 물고기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요나가 피하려 했던 하나님은 바다와 물고기, 바람과 파도까지 다스리십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거역했지만, 물고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합니다.
이 장면에는 요나를 향한 조용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도망했지만, 말씀을 받지 않은 피조물인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은 요나를 조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육지에 세우신다는 데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 인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토해 내게 하심으로, 다시 말씀을 듣고 사명을 감당할 기회를 주십니다.
“육지”는 요나가 처음 떠났던 곳과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이전의 육지는 그가 도망을 시작한 자리였다면, 이제의 육지는 은혜로 되돌려진 자리입니다. 같은 땅에 다시 서게 되었지만, 요나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깊음과 구덩이, 무력함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주시는 기회는 과거를 지우는 값싼 면제가 아니라, 은혜를 알고 더 깊이 순종하도록 부르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도 실패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넘어졌던 사람을 다시 세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실패만 바라보며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실 때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론|깊음에서도 들으시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첫 번째|하나님은 가장 깊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요나는 스올의 뱃속, 산의 뿌리, 구덩이와 같은 죽음의 언어로 자신의 처지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깊음은 하나님의 귀에서 멀어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만 아니라, 절망과 후회, 무력함 속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부르짖음도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책감이나 실패 때문에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멀리 숨는 일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입니다.
두 번째|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힘과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여호와를 생각하고 성전을 바라봅니다. 모든 고난을 단순히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난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 같은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기도의 자리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고난이 없다는 확신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세 번째|헛된 것을 붙들 때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요나는 우상을 붙드는 사람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삶의 우상은 눈에 보이는 형상만이 아닙니다. 재물과 성공, 사람의 인정, 자기 계획과 통제력, 심지어 상처와 편견도 하나님보다 크게 붙들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잠시 안전을 약속하지만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회개는 헛된 것에서 손을 떼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의 은혜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네 번째|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는 요나의 고백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내려놓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죄와 죽음의 깊음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도망친 요나를 다시 육지에 세우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우리도 새롭게 하셔서 다시 순종의 길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 고백도 요나와 같아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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