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강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왕, 버림받음 속에서 열리는 구원의 길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장사되심을 기록한 복음의 중심부입니다. 유다는 죄책감 속에 무너지고, 빌라도는 진리를 알면서도 군중의 소리에 예수님을 넘기며, 군병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배신과 불의한 재판과 잔혹한 십자가 처형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강도들 가운데 달리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심으로 죄인이 받아야 할 버림받음을 대신 담당하십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는 이 본문 앞에서 십자가를 단순한 비극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7장을 통해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유다의 후회와 빌라도의 재판, 죄 없는 왕이 죄인의 자리에 서시다

마태복음 27장은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여기서 “넘기다”는 뜻의 헬라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수난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겼고,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넘겼으며, 빌라도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군병들에게 넘깁니다. 인간의 손에서 손으로 예수님이 넘겨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칩니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다의 말은 예수님의 무죄성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뉘우침은 참된 회개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는 죄를 인정했지만 주님께 돌아가지 않았고,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단지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곧 마음과 방향의 전환입니다. 죄를 슬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유다의 비극은 우리에게 두려운 경고가 됩니다. 죄책감이 반드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은혜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죄를 들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절망 안에 갇히고 맙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눈물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는 눈물이었습니다. 유다의 후회는 자기 안으로 말려 들어간 절망이었습니다. 성도는 죄를 보았을 때 자기 자신을 끝없이 파헤치는 데 머물지 말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보다 크신 은혜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성전고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피 값”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려는 죄에는 무감각하면서, 돈을 성전고에 넣는 절차적 정결에는 민감합니다. 종교가 외형과 절차만 남고 하나님 앞의 진실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손은 씻으려 하지만 마음은 더럽고, 규정은 지키려 하지만 공의와 긍휼은 버립니다.

그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습니다. 마태는 이것이 선지자의 말씀을 이룬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은 삼십, 토기장이, 피밭의 이미지는 스가랴와 예레미야의 예언적 배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의 악한 결정조차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악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압도하여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총독 앞에 서십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왕권은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로마의 왕권은 칼과 군대와 제국의 질서 위에 서 있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진리와 순종과 자기희생 위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왕, 조롱받는 왕,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시는 왕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는 이상히 여깁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력함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처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잠잠하신 순종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여 빠져나갈 수 있으셨지만,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침묵하십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패배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입니다.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가 원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라바는 이름난 죄수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바라바는 죄인이지만 풀려나고, 예수님은 죄 없으시지만 죽음에 넘겨집니다. 이 장면은 복음의 대속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죄인이 자유를 얻고 의인이 대신 죽습니다. 바라바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은혜로 주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꿈으로 인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군중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손을 씻는다고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외면하는 것은 죄입니다. 성도는 빌라도를 보며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소리를 두려워하여 진리를 외면한 적은 없는가? 나의 손은 깨끗한 척하지만 마음은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롱받는 왕과 골고다의 십자가, 저주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깁니다. 로마의 채찍질은 매우 잔혹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잔혹한 묘사를 길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고난받으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데려가 온 군대를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긴 뒤 홍포를 입힙니다.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합니다.

홍포, 가시관, 갈대는 모두 왕권을 조롱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조롱으로 입힌 왕의 표지가 사실은 예수님의 참 왕권을 드러냅니다. 가시는 창세기 3장에서 죄로 인해 땅이 받은 저주의 상징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심으로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을 자기 머리에 짊어지십니다. 갈대는 연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권세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나라는 세상의 폭력보다 강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로 끌려가십니다. 골고다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죄의 마지막 결과가 죽음임을 상징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쓸개 탄 포도주를 받으셨지만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흐리게 하거나 피하지 않으십니다. 죄인을 위한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는 헬라어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입니다. 로마 시대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럽고 잔혹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시민권자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반역자나 노예와 같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은 나무에 달린 자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말하듯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다.

군병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눕니다. 이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마태복음 27장은 곳곳에서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의 성취를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갑작스러운 실패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성경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구속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습니다. 빌라도와 로마는 조롱의 의미로 붙였을지 모르지만, 그 문구는 진실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십니다. 다만 그 왕은 자기 원수를 죽여 왕좌에 오르는 분이 아니라, 원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 사이에 못 박히십니다. 이 또한 이사야 53장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죄인들 가운데 서십니다. 태어나실 때는 낮은 말구유에 누우셨고, 사역 중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으며, 죽으실 때는 강도들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조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들의 말은 조롱이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조롱은 광야 시험에서 마귀가 했던 말과 닮아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조롱도 같은 시험입니다. 고난 없는 메시아, 십자가 없는 영광, 자기 보존의 길을 택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에 머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버림받음의 부르짖음과 성소 휘장, 새 길이 열리다

제육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육시는 정오, 제구시는 오후 세 시쯤입니다. 한낮에 어둠이 임한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애곡의 상징입니다. 구약 선지서에서 어둠은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께 임하고 있습니다.

제구시쯤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질러 말씀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는 깊은 단절과 고통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묵상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분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찢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의미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심판의 버림받음을 경험하십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저주와 단절의 고통을 주님께서 짊어지십니다.

이 부르짖음은 절망만이 아닙니다. 시편 22편은 버림받음의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모든 민족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부르심으로 자신의 고난이 성경의 성취이며, 그 끝이 부활과 열방의 구원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십니다. 십자가의 탄식 속에도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합니다. 어떤 이는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다른 이들은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고 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아래에서도 구경꾼이 됩니다. 고통받는 주님 앞에서조차 호기심과 조롱으로 머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경배하며 자신이 그 은혜로 사는 사람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힘없이 사라지는 죽음이 아닙니다. 크게 소리 지르셨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끝까지 의식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음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은 이 순간 “다 이루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그 죽음의 결과를 성전 휘장의 찢어짐으로 보여 줍니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됩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두꺼운 막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였고,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 휘장이 찢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표징입니다.

중요한 것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아래에서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에서 여신 길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길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육체가 찢기심으로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제 성도는 짐승의 피나 반복되는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무덤들이 열립니다.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 후에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입니다. 이 장면은 신비롭고 해석이 쉽지 않지만, 분명한 메시지는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의 권세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패배가 시작된 자리입니다. 무덤이 열리는 표징은 부활의 새 시대가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이 지진과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태복음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십자가 아래의 이방 군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리는 구원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여인들의 증언과 아리마대 요셉의 장사, 침묵의 토요일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마태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언급됩니다. 제자들은 도망갔고 베드로는 부인했지만, 이 여인들은 십자가의 마지막 자리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조용하지만 깊은 충성의 증언입니다.

성경은 큰소리치는 믿음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끝까지 곁에 머무는 믿음, 눈물로 바라보는 믿음, 할 수 있는 만큼 주님을 섬기는 믿음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인들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지 않았지만,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의 첫 증언자들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실함을 통해 이어집니다.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고,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기 새 무덤에 모십니다. 요셉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자신을 드러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어렵지만, 처형당한 예수님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주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예수님의 장사는 복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장사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징적 죽음이나 정신적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몸으로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실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장사는 십자가 죽음의 확실성을 증언하고, 동시에 부활의 역사성을 준비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보다 대적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더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말할까 염려하여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어 주고, 그들은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킵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덤을 지킨다고 생명의 주님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인봉된 돌, 로마의 경비병, 종교 지도자들의 염려는 오히려 부활의 증거를 더 분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계와 봉인을 넘어 일하십니다. 마태복음 27장은 무덤이 닫힌 채 끝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침묵의 토요일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무덤이 닫힌 것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보이지 않고, 사랑해도 변화가 없으며, 말씀을 붙들어도 현실은 차갑게 닫혀 있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닫힌 무덤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금요일과 침묵의 토요일은 부활의 주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간에도 일하십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7장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입니다. 유다의 절망,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빌라도의 비겁함, 군중의 폭력, 군병들의 조롱 속에서 예수님은 죄 없는 왕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십니다.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지만, 찢어진 휘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길이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를 받아 주셨고,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흔드셨으며, 무덤에 묻히심으로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지 말고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피로 열린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며,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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