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강해 향유 부음,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 배신과 두려움 속에서도 완성되는 하나님의 뜻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가시는 장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한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듯 향유를 붓고,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을 넘기며,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에서 새 언약의 피를 말씀하십니다. 겟세마네에서는 깊은 슬픔과 고뇌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고, 체포와 재판의 자리에서는 침묵과 진리의 증언으로 메시아의 길을 걸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하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하며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는 이 장을 읽으며 단지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뜻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6장을 통해 배신보다 크신 주님의 사랑, 두려움보다 깊은 순종, 인간의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죽음의 모의와 향유의 헌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두 시선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우연한 비극으로 맞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의식적으로 걸어가십니다. 여기서 “인자”는 헬라어 휘오스 투 안드로푸(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로, 다니엘 7장의 영광스러운 왕적 인물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인자는 영광을 받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참 왕은 힘으로 자기 백성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들은 백성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교묘함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합니다. 경건의 옷을 입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살인의 계획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전혀 다른 향기를 풍깁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자주 머무시던 곳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는 표현은 그가 과거에 나병환자였거나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일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의 모의가 있는 예루살렘 권력의 공간과 달리, 베다니의 집에는 조용한 사랑의 헌신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보고 분개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그들은 향유를 비싸게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들으면 매우 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변호하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좋은”은 단순히 실용적으로 유익하다는 뜻을 넘어 아름답고 고귀한 일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칼로스(καλός)의 의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선입니다.

제자들은 향유를 “허비”라고 보았지만, 예수님은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선 차이입니다. 계산의 눈으로 보면 헌신은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주님께 드린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신 주님께 향한 가장 깊은 응답이 되었습니다.

향유는 귀한 물질이면서 동시에 삶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조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향유가 부어질 때 그 향기는 집 안에 퍼졌을 것입니다. 참된 헌신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드릴 때 그 향기는 공동체 안에 퍼집니다. 사랑은 계산보다 오래 남고, 헌신은 말보다 깊은 증언이 됩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헌신이 기억된다는 말씀은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그 복음의 이야기 안에 한 여인의 사랑이 함께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작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한 헌신도 주님께서 받으시면 영원한 의미가 됩니다.

반면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줍니다. 은 삼십은 구약에서 종의 몸값과 관련된 금액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탐욕 속에서 종의 값으로 팔리십니다. 여기서 “넘겨주다”는 의미의 헬라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내어 주십니다. 인간의 배신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같은 사건 안에서 교차합니다.

유다의 죄는 단지 돈을 사랑한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 오래 있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음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자동으로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자리는 익숙해질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면서도 마음은 차가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식탁과 새 언약, 주님의 몸과 피로 세워지는 구원

무교절의 첫날,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준비할지 묻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심판을 넘어가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 페사흐(פֶּסַח)와 관련되며, 넘어가다, 지나가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을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 식탁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 유월절 어린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한 것처럼,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심판에서 건져 내는 새 출애굽의 피입니다.

식사 중 예수님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심합니다. 진실한 신앙은 자기 마음을 너무 쉽게 확신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는 장담보다 “주님, 제 안에도 그런 연약함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두려운 자기 성찰이 더 복음에 가깝습니다.

유다도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지만, 유다는 “랍비여”라고 부릅니다. 물론 호칭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태는 이 차이를 통해 유다의 내적 거리를 보여 주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식탁에서 그를 몰아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은 얼마나 깊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가까이 두고도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십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은 헬라어 디아데케(διαθήκη)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구원의 약속을 뜻합니다.

구약의 언약은 피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는 언약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제사와 짐승의 피가 예표하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더 이상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단번에 드려지는 완전한 희생입니다.

“죄 사함”은 헬라어 아페시스(ἄφεσις)로, 풀어 줌, 탕감, 해방의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지 감동적인 희생의 상징이 아닙니다. 죄의 빚을 탕감하고, 죄의 종살이에서 풀어 주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를 화목하게 하는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성도가 자기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린다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시며,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이십니다. 구속사의 모든 흐름이 이 식탁과 십자가를 향해 모입니다.

성찬은 기억이자 참여입니다

성찬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참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자리입니다. 떡은 찢기신 몸을, 잔은 흘리신 피를 가리킵니다. 성도는 성찬 앞에서 자신이 죄 사함 받은 사람임을 기억합니다. 또한 성찬은 공동체적 식탁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로 살아난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목뿐 아니라 형제와의 화목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찬미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깊습니다. 상황이 좋아서 찬양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기에 찬미하십니다. 성도의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은 고통이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십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람유를 얻기 위해 올리브가 눌리고 짜이는 곳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비추는 듯합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영혼이 짓눌리는 깊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며 고민하고 슬퍼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고민하다”는 말은 깊은 괴로움과 압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고통을 모른 척 통과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실제로 슬퍼하시고 두려움의 깊은 밤을 지나셨습니다.

주님은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잔”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신 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하는 영적 고통입니다.

이 기도는 순종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끝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성도의 기도도 여기서 배웁니다. 믿음은 아픔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픔을 아버지께 다 아뢰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시니 그들은 자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여기서 “시험”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로, 유혹과 시련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시험은 밖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피곤함, 자기 확신, 두려움, 육신의 연약함을 타고 들어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책망이면서 동시에 깊은 긍휼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이 기도를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하기 때문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지만,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주님께 엎드립니다.

예수님은 세 번 기도하십니다. 반복되는 기도 속에서 상황이 즉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십니다. 기도는 언제나 환경을 바꾸는 방식으로만 응답되지 않습니다. 때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으로 데려갑니다. 잔이 사라지지 않아도, 그 잔을 마실 순종의 힘을 주십니다.

체포와 재판,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참 왕의 권위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다가 큰 무리와 함께 옵니다. 그들은 칼과 몽치를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입맞춤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데, 유다는 그것을 배신의 신호로 사용합니다. 가장 친밀한 표현이 가장 어두운 죄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친구”라는 부름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주님은 배신자를 향해서도 분노의 언어로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부드러움이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거룩한 사랑 앞에서 유다의 죄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폭력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능력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 말씀은 마태복음 26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간의 음모가 승리한 사건이 아니라 성경의 성취입니다. “이루어지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안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대제사장들의 흉계, 유다의 배신, 제자들의 도망, 거짓 증언, 십자가의 길까지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책임이 있고, 종교 지도자들은 죄가 있으며, 제자들의 도망도 연약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붙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지만,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십자가는 인간 죄의 가장 어두운 폭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밝은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거기서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 그들은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종교가 권력화될 때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제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거짓 증인이 왔지만 증거를 얻지 못하다가, 두 사람이 “이 사람이 말하되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모독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게 비틀었습니다. 말씀을 자기 욕망에 맞게 왜곡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죄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은 시편 110편과 다니엘 7장을 결합한 장엄한 선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피고인처럼 서 계시지만, 실상은 장차 심판주로 오실 왕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 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를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침 뱉고 주먹으로 치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지만, 그분은 그들의 죄와 우리의 죄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조롱받는 그리스도는 힘없는 패배자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 모욕을 감당하시는 구원자입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 인간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자리

한편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은 그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설 용기도 없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종종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주님과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 공동체와 순종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시험 앞에 약해집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합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또 다른 여종이 말하자 그는 맹세하며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그의 말소리를 통해 알아보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심지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시험 앞에서 그는 무너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두려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자기 확신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신앙은 오직 주님의 은혜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닭이 곧 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것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통곡하다”는 말은 단순한 후회보다 깊은 회개의 슬픔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입니다. 유다도 후회했지만 주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무너졌지만 주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찔렀고, 그 눈물 속에서 다시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성도에게도 닭 울음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렸던 것이 갑자기 생각나는 순간, 내가 장담했던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 드러나는 순간,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삶으로는 부인했던 자신을 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숨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울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은혜의 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은 우리에게 인간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유다는 팔아넘기며, 제자들은 잠들고 도망가며, 베드로는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실패의 한가운데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가십니다. 복음은 인간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불신실함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6장은 십자가 전야의 어둠을 보여 주지만,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뜻은 더욱 선명하게 빛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모의와 제자의 배신, 겟세마네의 고통과 거짓 재판, 베드로의 부인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헌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향기를 보여 주고, 유월절 식탁의 떡과 잔은 새 언약의 은혜를 드러내며, 겟세마네의 기도는 참된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본문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함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배신당하시면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모욕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으며, 십자가를 향해 가심으로 죄 사함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 앞에 엎드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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