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강해 열처녀 비유
깨어 기다리고 충성되게 맡기며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삶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24장의 종말 담론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제자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세 가지 비유와 장면으로 가르치십니다. 열 처녀 비유는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달란트 비유는 맡겨진 은혜에 충성하는 삶을, 양과 염소의 심판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사랑이 곧 주님께 행한 사랑임을 보여 줍니다. 이 장은 단순히 미래의 심판을 말하는 본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살아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는 이 본문 앞에서 “나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고 있는가,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5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살피며, 주님 오실 날을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준비하는 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열 처녀 비유, 기다림은 준비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5장은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때”는 앞장인 마태복음 24장의 흐름, 곧 인자의 오심과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종말을 추상적인 교리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혼인 잔치의 이미지로 풀어 주십니다.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적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며,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모습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두 잔치에 참여하려고 나왔고, 모두 신랑을 기다렸으며,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고 하십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헬라어 모로스(μωρός)로, 단순히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슬기롭다”는 말은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로, 현실을 바르게 분별하고 장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차이는 등 자체가 아니라 기름에 있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고, 슬기로운 자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갔습니다. 등은 외적인 신앙의 모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참석, 종교적 언어, 교회 안의 활동, 신앙의 형식이 등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은 내면의 참된 믿음, 성령의 역사, 말씀 안에 지속되는 생명, 주님을 향한 실제적 사랑과 준비를 상징합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기름을 어떤 하나의 교리적 요소로 지나치게 좁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겉모양만으로는 마지막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모두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납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여기서 신랑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을 떠올리게 합니다. 초대교회 이후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간이 사람의 계산과 같지 않기에 기다림은 길어집니다. 이 길어진 시간 속에서 믿음의 진위가 드러납니다. 잠시 뜨거운 감정으로는 기다릴 수 있지만, 긴 밤을 지나려면 준비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시지만, 이 비유는 인간의 연약함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도도 지칠 수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피곤할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영적으로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신랑이 왔을 때 다시 일어나 등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다시 일어나 반응할 수 있는 준비된 생명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냉정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믿음의 준비는 남에게 빌릴 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부모의 믿음, 목회자의 믿음, 공동체의 열심, 주변 사람의 경건은 나를 돕고 격려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각 사람입니다. 믿음은 대신 살아 줄 수 없고, 회개도 대신할 수 없으며, 주님과의 관계도 빌려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준비한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며 문은 닫힙니다. 여기서 “문이 닫혔다”는 표현은 엄숙합니다. 은혜의 초청은 참으로 넓지만, 그 초청을 영원히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무한한 방치가 아닙니다. 주님은 오래 기다리시지만, 마지막에는 문이 닫히는 때가 있습니다.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치지만,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인식이 아니라 언약적 관계를 뜻합니다. 히브리적 배경에서 안다는 것은 사랑하고 인정하며 관계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은 종교적 겉모양은 있었지만 신랑과 참된 관계가 없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합니다. 나는 주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알려진 사람입니까? 나는 등을 들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기름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결론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헬라어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로,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깨어 있음은 종말 날짜를 계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오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오늘 사랑을 실천하며, 오늘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성도는 내일의 재림을 말하면서 오늘의 순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의 작은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 은혜는 맡겨진 사명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자기 종들을 불러 소유를 맡깁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재능이라는 뜻으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지만, 본래는 매우 큰 무게와 가치를 가진 화폐 단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혜, 시간, 은사, 기회, 사명, 복음의 책임을 포괄적으로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겼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분량을 주시지는 않지만, 각 사람에게 합당한 분량을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가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핵심은 많이 받았느냐 적게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맡겨진 것에 어떻게 응답했느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깁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남깁니다. 여기서 “바로 가서”라는 흐름은 충성의 신속함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주인의 뜻을 알고 지체하지 않습니다. 충성은 막연한 감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입니다. 믿음은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둡니다. 그는 주인의 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최소한 손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불충성은 단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맡겨진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불충성입니다. 해야 할 사랑을 하지 않고,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용해야 할 은혜를 묻어 두는 것 역시 죄의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랜 후에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합니다. 여기서 “결산”은 헬라어 쉬나이로 로곤(συναίρει λόγον)이라는 표현의 의미와 연결되며, 맡긴 것에 대해 셈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연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되는 삶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행위로 얻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반드시 열매로 드러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인의 칭찬은 동일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아가토스(ἀγαθός), 선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며, “충성된”은 피스토스(πιστός)로 신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성과의 크기보다 충성의 진실성을 보십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자와 두 달란트 남긴 자의 결과는 다르지만, 칭찬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남과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으시고, 맡기신 분량 안에서 신실했는지를 보십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말씀은 충성의 종착지가 더 많은 노동만이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충성은 결국 기쁨으로 들어갑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드린 작은 순종, 보이지 않는 섬김, 남몰래 흘린 눈물, 지치지 않고 감당한 사명은 주님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말에는 그의 신앙의 왜곡이 드러납니다. 그는 주인을 은혜로운 분으로 알지 못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아는 것은 삶을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을 인색하고 가혹한 분으로만 생각하면 사람은 사랑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숨어 버립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경외는 비굴한 공포가 아닙니다. 경외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믿음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두려움은 경외가 아니라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맡겨진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았으며,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란트를 잃지 않으려고 땅에 묻었지만, 사실은 자기 삶 자체를 묻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받은 것이 적다”,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 “괜히 하다가 실패하면 어쩌나”, “다른 사람들처럼 큰 은사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묻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달란트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도 주인의 것입니다. 작은 은사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며, 작은 자리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귀합니다.
문제는 작음이 아니라 묻어 둠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사용하면 자라고,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면 열매를 맺습니다. 작은 시간이라도 주님께 드리면 거룩해지고, 작은 은사라도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 누군가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기보다 이미 맡기신 것에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은 세상의 부익부 빈익빈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리를 말합니다.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은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지만, 은혜를 묻어 두고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마저 잃게 됩니다. 말씀은 순종할수록 밝아지고, 은사는 사용할수록 자라며, 사랑은 나눌수록 깊어집니다.
양과 염소의 심판, 사랑은 주님께 닿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장면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를 보여 줍니다.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진 종의 모습만이 아니라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타나십니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부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메시아이지만, 동시에 마지막 날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인자이십니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사람들을 구분하십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성경에서 목자는 하나님의 왕적 돌봄을 상징합니다.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목자는 동시에 분별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은혜의 목자가 심판의 왕이신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왕은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여기서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로,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 안에 들어가는 구원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 나라는 인간이 만든 성취가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는 나라를 획득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나라를 상속받는 자녀입니다.
그런데 왕은 그들이 행한 일을 말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 나그네에게 영접, 헐벗은 자에게 옷, 병든 자에게 돌봄, 갇힌 자에게 방문입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몸을 가진 행위입니다.
의인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큰일을 했다고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특징입니다. 자기 의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공로로 쌓아 두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눈앞의 작은 자를 외면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왕은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절정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 도움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사람, 세상에서 쉽게 잊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문맥상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형제들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 전체의 정신 안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작은 자들과 동일시하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높은 자리에서만 발견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낮은 자리, 배고픔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과 병듦과 갇힘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져 사람이 되셨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셨으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은 단순한 윤리 행위가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앙 행위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뜻인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5장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사랑을 낳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이웃을 향해 움직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심판은 행위로 공로를 세운 사람을 칭찬하는 장면이 아니라,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소속을 드러내십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왕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들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공격한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외면의 죄였습니다. 주릴 때 먹이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입히지 않았고,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은 사랑, 미룬 자비, 외면한 고통이 심판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들도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그들은 주님을 보았다면 섬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외면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교회와 성도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지만, 예배당 밖의 작은 자들 속에 계신 주님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의 바름을 말하지만,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마음이 닫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의 굶주림과 외로움과 눈물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어디서 찾고 있느냐?”
세 비유가 함께 가르치는 제자의 길
마태복음 25장의 세 부분은 서로 분리된 교훈이 아닙니다. 열 처녀 비유는 주님을 기다리는 내면의 준비를 말하고, 달란트 비유는 맡겨진 사명에 대한 충성을 말하며, 양과 염소의 심판은 사랑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진실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제자의 삶은 기다림, 충성,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기다림 없는 충성은 쉽게 세속적 성취로 변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충성 없는 기다림은 공허한 종교 감정이 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맡겨진 일을 묻어 둔다면 그것은 참된 기다림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충성은 차가운 의무가 되고, 사랑 없는 기다림은 자기 구원만 챙기는 폐쇄적 신앙이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깨어 기다리며,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고, 작은 자를 주님처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신랑은 옵니다. 주인은 돌아옵니다.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의 시간관입니다. 세상은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역사가 하나님의 정하신 완성을 향해 간다고 말합니다. 그 완성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오늘은 마지막 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이 성도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오늘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오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충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작은 자에게 한 잔의 물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묻어 둔 달란트를 꺼낼 수 있습니다. 오늘 꺼져 가는 등불을 살피며 기름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날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으로 초대받는 일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미래의 호기심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늘의 순종으로 이끕니다. 주님은 우리가 종말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종말을 믿기 때문에 더 겸손히 사랑하고, 더 성실히 섬기며, 더 진실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날을 바라보는 성도의 삶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름을 준비해야 하고, 주인의 것을 맡은 종처럼 충성스럽게 살아야 하며, 영광의 왕 앞에 설 사람답게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겉모양의 신앙이 아니라 준비된 믿음을 보시고, 받은 분량의 크기가 아니라 충성의 진실함을 보시며, 말로만 고백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러간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하루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살피고, 오늘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오늘 만나는 작은 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신랑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인자는 반드시 영광 중에 오십니다. 그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