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강해
깨어 기다리는 제자의 믿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무너짐과 마지막 때의 징조, 그리고 인자의 오심과 깨어 있는 제자의 삶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 장은 단순히 세상의 종말을 계산하라고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는 이 본문 앞에서 미래에 대한 호기심보다 오늘의 순종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날짜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마태복음 24장을 통해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사라질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서 있다는 사실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성전의 무너짐과 보이는 영광의 한계
마태복음 24장은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예수님께 보이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중심이었고, 민족의 자부심이었으며, 하나님 임재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헤롯 성전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종교적 권위와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지 한 건물의 붕괴를 예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는 종교의 영광, 인간이 붙드는 제도와 건축물, 외형적 신앙의 안정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에게 주신 중요한 은혜의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할 때, 성전은 더 이상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인간의 교만을 감추는 껍데기가 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고, 그 성전은 자기 육체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열립니다.
성전의 무너짐은 옛 질서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제사와 제단과 성전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 건물입니까, 직분입니까, 종교적 습관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주님은 무너질 수 있는 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큰 건물, 많은 숫자, 화려한 성공, 안정된 제도는 우리에게 안심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는 성전 너머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외형의 웅장함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세워지는 참된 믿음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돌 성전은 무너졌지만,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운 나라는 영원합니다.
미혹과 환난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믿음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질문에는 성전 파괴와 주님의 임하심, 세상 끝에 대한 궁금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하시면서 먼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미혹하다”는 말은 헬라어 플라나오(πλανάω)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길을 잃게 하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큰 위험은 단지 전쟁이나 재난이 아닙니다. 더 깊은 위험은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단순히 이상한 종교 지도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돈이 너를 구원한다, 성공이 너를 증명한다, 정치 권력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한다, 네 욕망이 곧 진리라고 말하는 모든 소리가 거짓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재난”은 헬라어 오딘(ὠδίν)으로, 해산의 고통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의 고통은 무의미한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해산의 진통과 같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실제로 아프고 두렵지만, 그 끝에는 새 생명의 탄생이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혼란을 낭만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전쟁, 기근, 지진, 박해는 실제 고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좌절시키는 증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흔들림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역사의 주권을 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난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며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환난”은 헬라어 들립시스(θλῖψις)입니다. 압박, 짓눌림, 고난을 뜻합니다. 신앙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에서 자동으로 면제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이 따릅니다. 성도는 때로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진리 때문에 외로워지며, 사랑 때문에 오해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견디다”는 말은 헬라어 휘포메노(ὑπομένω)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래에 머물다, 버티다,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이를 악물고 참는 심리적 강인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 아래 머무는 믿음입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십니다. “사랑”은 헬라어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불법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보호에 몰두하며, 냉소와 분노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감정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품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그렇습니다. 정보는 많지만 진리는 희미해지고, 연결은 많지만 사랑은 차가워지며, 분노는 빠르게 퍼지지만 오래 참는 마음은 사라져 갑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은 우리에게 계산보다 분별을, 공포보다 믿음을, 냉소보다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해 두려움을 팔거나, 종말의 호기심으로 사람을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의 중심을 붙들고 끝까지 사랑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역사의 중심은 재난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세상의 끝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은 전쟁도, 제국도, 경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입니다. “복음”은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지막 때를 말할 때 복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종말론의 목적은 공포가 아니라 선교이며, 계산이 아니라 증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과 거짓 평안의 붕괴
예수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다니엘서의 예언을 배경으로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힌 사건, 더 넓게는 예루살렘 멸망과 로마 군대의 침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증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자리에 우상과 불경건이 들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해야 할 곳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과거 사건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선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는 상태입니다. 성전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권력, 욕망, 우상, 거짓 종교, 인간의 교만이 들어섭니다. 오늘 우리 마음도 작은 성전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이어야 할 마음에 탐욕이 앉고, 미움이 앉고, 자기 의가 앉고, 세상의 인정 욕구가 앉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의미에서 거룩한 곳의 훼손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임박한 심판 앞에서 지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는 마음은 심판의 때에 위험합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을 떠나면서도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해야 할 때 미루고, 끊어야 할 것을 붙들고, 순종해야 할 때 계산하면 영혼은 점점 무뎌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들릴 때에는 뒤돌아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십니다. 죄에서 떠나는 일, 우상에서 돌아서는 일, 복음으로 돌아오는 일은 미룰수록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은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함을 가리키면서도, 궁극적으로 종말의 고난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도 은혜가 있습니다.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택하신 자”는 헬라어 에클렉토스(ἐκλεκτός)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안에서 부름받은 백성을 뜻합니다. 환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고난의 날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위로를 얻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무한정 방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가 있습니다. 욥의 고난에도 한계가 있었고,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에도 정한 때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도 부활의 아침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고난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주권의 크기를 더 깊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표적 자체가 항상 진리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수 있지만, 사람이 표적만을 좇을 때 그것은 미혹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놀라운 현상을 보고 흥분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립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강렬한 경험을 원합니다. 즉각적인 응답, 눈에 보이는 기적, 특별한 계시, 자극적인 종말 예언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이미 주신 말씀으로 충분히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소문보다 오래된 복음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화려한 표적보다 십자가의 진리를 더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해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광야와 골방은 각각 외적 열광과 은밀한 비밀주의를 상징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밖으로 몰려다니며 특별한 현장을 찾고, 어떤 사람은 은밀한 계시와 비밀스러운 지식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그런 식으로 숨겨지지 않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은밀한 소수가 독점하는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이 알게 될 하나님의 공개적이고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인자의 오심과 무화과나무의 교훈
예수님은 환난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새 시대의 도래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묵시적 언어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세상의 질서와 권세, 인간이 안정의 근거로 삼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피조 세계와 인간 역사의 모든 권세는 흔들립니다.
그때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인자”는 헬라어 휘오스 투 안드로푸(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로, 다니엘 7장의 “인자 같은 이”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섬기게 되는 왕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는 종이시면서 동시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왕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낮아짐으로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누우셨고, 죄인들과 함께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자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십니다. 이것은 두 예수님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예수님이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재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고, 재림은 그분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팔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전쟁의 선포, 희년의 기쁨, 백성의 소집을 알리는 상징입니다. 마지막 날의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진 자리에서 완전히 모이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지금 성도는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약해 보이며, 때로는 역사의 주변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듯이,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서는 계절을 분별하는 지혜의 비유로 사용됩니다. 성도는 시대의 징조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를 보며 흥분하거나 날짜를 계산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성도는 징조를 통해 주님의 약속을 더 깊이 붙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4장의 중심축과 같습니다. 성전도 무너지고, 나라들도 흔들리고, 하늘의 권능들도 흔들리지만,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도의 안전은 세상의 안정에 있지 않고 말씀의 영원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문장이 아니라 역사를 붙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선언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매일 우리에게 불안을 줍니다. 뉴스는 두려움을 주고, 사람들의 말은 마음을 흔들며, 미래는 불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중심으로 부릅니다. 말씀 앞에 앉는다는 것은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 이전에 말씀 아래 머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노아의 때와 깨어 있음의 신앙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적으로 멈추게 합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비밀스러운 시간표가 아니라 신실한 깨어 있음입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드십니다. 홍수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 자체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심판의 경고 앞에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은 은혜의 자리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무감각의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계획을 세우는 그 모든 삶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의식하고 있는가? 종말 신앙은 일상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 한마디, 오늘의 선택 하나, 오늘의 용서와 순종이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같은 장소, 같은 일상, 같은 노동 속에 있어도 마지막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은 외형의 유사성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참된 소속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헬라어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입니다. 잠들지 않고 정신을 차리며 주의 깊게 경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적 깨어 있음은 불안에 떠는 상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맑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붙들고, 죄의 유혹을 분별하며, 주어진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삶입니다.
도둑 비유도 같은 의미입니다. 집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인자의 오심도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리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준비”는 헬라어 헤토이모스(ἕτοιμος)의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준비된 성도는 특별한 종말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마지막 부분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주인이 맡긴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은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종의 충성은 거창한 업적보다 맡겨진 일을 제때에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특별한 감정의 고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족, 교회, 일터, 이웃, 말씀의 자리에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는 삶입니다.
반면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먹고 마십니다. 주인의 지연을 방종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재림 신앙이 흐려질 때 나타나는 영적 타락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믿음이 희미해지면 사람은 맡겨진 책임을 잊고 자기 욕망을 주인처럼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종말론은 먼 미래의 교리가 아니라 오늘의 윤리를 세우는 신앙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시간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으며,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동시에 두려움에 눌려 살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심판주로 오시지만, 성도에게는 신랑이요 왕이요 구원자로 오십니다. 깨어 있음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마무리
마태복음 24장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의 지도를 주기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제자의 마음을 가르쳐 줍니다. 성전은 무너지고 세상은 흔들리며 거짓된 소리는 많아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재난의 소문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 앞에서 말씀으로 분별하며,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날짜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의 순종을 깨우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하고, 복음을 증언하며, 마음의 성전을 깨끗이 하고, 주님 오실 날을 사랑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 위에 서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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