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강해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작은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가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길은 점점 예루살렘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길 위에서 예수님은 결혼과 이혼, 독신, 어린아이, 재물과 영생, 제자의 상급이라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십니다. 본문 전체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완악함으로 왜곡된 삶의 질서를 하나님의 창조 뜻으로 회복하시고, 자기 의와 소유를 내려놓은 자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시는 왕이십니다.

창조의 뜻으로 결혼과 이혼을 다시 해석하시는 그리스도(마 19:1-15)

이혼 논쟁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마 19:1-9)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따랐고, 예수님은 거기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하며 묻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은 단순한 상담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혼 사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논쟁 속으로 예수님을 끌어들여 책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논쟁 방식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이혼할 수 있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결혼을 무엇으로 세우셨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질문은 언제나 허용 범위의 끝을 묻는 데서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 해도 죄가 아닙니까?”라는 질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무엇을 원하셨습니까?”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결혼을 인간 사회의 계약이나 감정적 선택에만 근거시키지 않으십니다. 결혼의 뿌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한 몸”은 헬라어 사르크스 미아(σὰρξ μία)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 결합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과 언약과 책임과 친밀함이 하나로 묶이는 결합입니다. 결혼은 두 개인이 편리하게 동거하는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언약적 연합으로 세워지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짝지어 주다”는 헬라어 쉬제우그뉘미(συζεύγνυμι)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게 하다, 함께 묶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결혼은 단지 사람이 서로를 선택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묶으신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그 결합을 가볍게 해체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완악함”은 헬라어 스클레로카르디아(σκληροκαρδία)입니다. 굳은 마음, 하나님 뜻을 향해 부드럽게 반응하지 않는 마음을 뜻합니다. 율법의 이혼 규정은 이혼을 이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이미 무너진 현실 속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무질서를 제한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한 문장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왜곡합니다. 사람은 죄 아래에서 자기 욕망과 편의를 따라 관계를 다룹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굳어진 현실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본래 뜻으로 우리를 되돌리십니다. 구속은 창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깨어진 창조 질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결혼 언약의 무게를 다시 세우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는 배우자의 외도, 유기, 폭력과 같은 심각한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단순하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하시는 것은 결혼을 자기 편의에 따라 가볍게 해체하는 마음이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언약적 충실함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독신과 은혜의 부르심(마 19:10-1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결혼 언약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느낀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 안에는 아직 결혼을 책임의 짐으로만 보는 시각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 종류의 고자를 언급하십니다. 모태로부터 된 자, 사람이 만든 자, 그리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자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자기 몸을 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특별한 부르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결혼은 창조 질서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선한 제도입니다. 동시에 독신도 결핍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어진 은사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혼을 절대화하지 않고, 독신을 열등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이 자기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은 강요가 아니라 은혜의 분별을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길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어떤 사람은 독신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깁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을 봅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목적 아래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기도 하고, 반대로 결혼을 인생의 완성처럼 절대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극단을 모두 넘어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삶을 보게 하십니다. 결혼한 사람은 언약의 충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독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온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보다 누구를 위해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를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마 19:13-15)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려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이기에 어린아이들을 방해물처럼 여겼을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힘과 지위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세상적 가치관이 아직 그들 안에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용납하다”는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입니다. 문맥에 따라 놓아두다, 허락하다, 보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길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작고 약한 자를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는 말씀은 어린아이의 순수함 자체가 구원의 공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를 내세울 권리와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공로와 자격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은혜를 받아야만 사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낮아짐과 의존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십니다. 짧은 장면이지만 앞의 결혼 논쟁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강한 자 중심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자기 편의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완악한 마음과 어린아이를 방해물로 여기는 마음은 모두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결혼 언약의 약자를 보호하시고, 어린아이 같은 작은 자를 품으십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힘 있는 사람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가 약한 자를 품고 회복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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