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강해 천국에서 큰자
작은 자를 품으시는 왕, 용서받은 자를 용서의 공동체로 세우시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어떤 마음과 질서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장입니다. 16장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17장에서는 영광의 산에서 내려와 믿음 없는 세대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18장에서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누가 큰 자인지,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권면해야 하는지, 용서받은 자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자기 높임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세워지며, 작은 자를 잃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권면과 용서 안에서 살아가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자입니다(마 18:1-14)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마 18:1-4)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세상적 서열 의식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상 나라의 질서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 더 큰 명예,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오늘날처럼 순수함의 상징으로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는 힘이 없고, 사회적 지위가 낮으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린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돌이키다”는 헬라어 스트레포(στρέφω)입니다. 방향을 바꾸다,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태도를 조금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크기의 기준에서 완전히 돌아서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입니다.
“낮추다”는 헬라어 타페이노오(ταπεινόω)입니다. 스스로를 낮은 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다. 이는 유치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과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로 서라는 뜻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말하는 은혜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람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무능을 알고 은혜를 의지하는 자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마 18:5-9)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 어린아이를 포함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 연약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주님은 작은 자를 자신의 이름과 연결하십니다. 작은 자를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죄를 매우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다”는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입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넘어뜨리는 것이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무섭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교회 안에서 강한 사람, 오래 믿은 사람, 직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말과 행동이 연약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작은 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을 넘어뜨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신체를 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단호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죄와 타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믿음의 길을 잃는 것보다, 아프더라도 죄의 통로를 끊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를 너무 쉽게 설명하고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참된 은혜는 죄를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주님께 돌이키게 합니다.
잃은 양 하나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뜻(마 18:10-14)
예수님은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업신여기다”는 상대를 하찮게 보고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는 조심하지만, 약한 사람에게는 쉽게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고 하시며, 작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찮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하나를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숫자로 사람을 보지 않으십니다. 공동체의 규모나 효율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십니다.
여기서 교회의 목회적 사명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강한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라, 작은 자를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공동체입니다. 연약한 자를 귀찮아하지 않고, 넘어지는 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죄를 다루는 교회는 권징과 기도 안에서 형제를 얻어야 합니다(마 18:15-20)
형제가 죄를 범하면 가서 권하라(마 18:15)
예수님은 이제 공동체 안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여기서 핵심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죄를 폭로하고 망신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복수하거나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표는 형제의 회복입니다.
“권고하다”는 헬라어 엘렝코(ἐλέγχω)입니다.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며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책망은 사랑 없는 비난이 아닙니다. 주님은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도 아니고, 모든 문제를 덮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능하면 형제의 명예를 보호하며 회개와 회복의 길을 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종종 반대로 행동합니다. 당사자에게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하고, 회복보다 소문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다룰 때에도 사랑과 질서를 요구하십니다. 진리는 사랑 없이 폭력이 될 수 있고, 사랑은 진리 없이 방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형제를 얻으라고 하십니다.
두세 증인과 교회의 권면(마 18:16-17)
만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신명기의 증인 원리를 반영합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판단은 사적인 감정이나 일방적 주장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죄를 다루는 일에는 공정성과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냉혹하게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언약적 질서 밖에 있는 사람처럼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세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회개의 초청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권징은 미움의 도구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마지막 사랑의 질서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의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지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말씀 선포와 성례와 함께, 권징은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고 죄인을 회복시키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권징이 인간의 권력 행사나 감정적 처벌이 되면 안 됩니다. 권징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거룩, 죄인의 회복입니다.
매고 푸는 권세와 함께하시는 주님(마 18:18-20)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십니다. “매다”와 “풀다”는 당시 유대적 배경에서 금지와 허용, 혹은 공동체적 판단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하여 죄와 회개, 용서와 공동체의 질서를 선언할 때, 그것은 하늘의 뜻을 증언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어 예수님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개인적 소원을 보장하는 문맥이 아닙니다. 앞뒤 흐름을 보면 죄를 범한 형제의 회복과 교회의 권징, 공동체의 분별과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죄를 다룰 때 인간적 분노나 정치적 계산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작은 모임의 위로로도 적용될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죄와 회복의 문제를 다룰 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규모나 제도 자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 모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 가운데 계십니다.
용서받은 자는 끝없이 용서하는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마 18:21-35)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마 18:21-22)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꽤 관대한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확히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계산법이 아닙니다. 완전수처럼 사용되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반복하여, 용서가 계산으로 제한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용서는 장부에 횟수를 적어 두는 방식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방향입니다.
물론 용서는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 단락에서 예수님은 죄를 분명히 다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용서는 불의를 방치하거나 학대를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용서는 죄를 죄로 인정하면서도, 복수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회복의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은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마 18:23-27)
예수님은 천국을 자기 종들과 결산하려는 임금에 비유하십니다. 한 종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금액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진 죄의 빚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 종은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종은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자기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의 빚은 인간의 노력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긍휼을 뜻합니다. “탕감하다”는 빚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죄인이 빚을 갚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탕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탕감은 값싼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한 종(마 18:28-30)
탕감받은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도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극히 작은 금액입니다. 그는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동료는 엎드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자신이 임금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허락하지 않고 동료를 옥에 가둡니다.
이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작은 빚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은혜를 경험했지만 은혜의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베풀어진 긍휼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용서받은 자의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은 실제 빚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은 실제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복수와 정죄만을 붙들고 살 수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마 18:31-35)
동료들이 이 일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임금에게 알립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그를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다”는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입니다. 놓아 주다, 빚을 탕감하다, 죄를 사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용서는 마음의 빚을 붙들고 상대를 계속 감옥에 가두는 일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그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의 열매를 맺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실제로 알지 못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겉으로만 괜찮다고 말하고 마음속으로는 계속 복수와 증오를 키우는 것은 온전한 용서가 아닙니다. 물론 깊은 상처일수록 용서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복수의 권리를 내려놓고 은혜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마음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자인지 물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큰 사람을 붙들지만,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를 귀히 여기고 잃은 양 하나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워집니다. 또한 교회는 죄를 방치하지도,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형제를 얻기 위해 사랑으로 권면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받은 자답게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 같은 죄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끝없이 정죄하는 삶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아짐을 배우십시오.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죄를 사랑으로 다루고, 용서를 은혜의 열매로 살아내십시오. 우리를 찾아오시고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교회를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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