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강해, 중풍병자 치유

 

죄인을 부르시고 병든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긍휼의 왕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능력자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며 죽음과 절망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보여 줍니다. 8장에서 예수님은 나병, 중풍, 열병, 풍랑, 귀신을 다스리셨습니다. 9장에서는 그 권세가 더 깊은 자리, 곧 인간의 죄와 소외와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긍휼히 부르시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회복하시며, 목자 없는 무리를 추수할 일꾼으로 세우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죄 사함의 권세로 죄인을 부르시는 왕(마 9:1-17)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려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간결하게 기록하지만,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죄 사함”은 헬라어 아페시스(ἄφεσις)와 관련된 개념으로, 죄의 빚을 탕감하고 속박에서 풀어 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먼저 “일어나 걸으라”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중풍병자의 병이 반드시 개인적 죄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난을 언제나 특정한 죄의 직접 결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병든 육체보다 더 깊은 인간의 비참, 곧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현실을 다루십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지 환경의 개선이나 육체의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듯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인간의 공로나 종교적 열심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나름의 신학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임한 하나님의 권세를 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외적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을 볼 뿐이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말로만 하면 죄 사함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는 치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십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죄 사함의 선언과 육체의 회복이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임했다는 표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라”는 헬라어 아콜루데오(ἀκολουθέω)는 단순히 뒤따라 걷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주님께 결속시키는 제자적 응답을 뜻합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의 조세 체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동족에게 착취자로 여겨지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그의 직업과 평판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은혜로 부르실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은혜의 부르심이 사람의 삶을 실제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인간은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근원은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앉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거룩이 분리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룩은 죄인을 외면하는 거룩이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는 거룩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에게 복음이 닫혀 있음을 경고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자기 의를 들고 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병든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은 외적 종교 행위보다 하나님의 마음, 곧 언약적 사랑과 자비가 중요함을 밝힙니다. 긍휼은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로,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약한 자를 향해 실제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뜻합니다.

이어지는 금식 논쟁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비유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혼인집 손님들이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시작된 때입니다. 그러나 그 잔치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이 기존 종교 체제의 단순한 보수나 보완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노스(καινός)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최근이라는 뜻을 넘어 성격상 새롭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결정적으로 새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어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던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낡은 자기 의와 형식적 경건의 부대에 복음을 담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안에서부터 새롭게 하며, 은혜로 새 생명의 질서를 열어 갑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생명과 회복을 베푸시는 왕(마 9:18-3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합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인물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현장으로 가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질병을 고치는 권세를 넘어 죽음까지 다스리는 주님의 권세가 드러나려는 순간입니다.

그 길에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겉옷 가를 만집니다. 혈루증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정결 규례와 관련하여 사회적·종교적 고립을 가져올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열두 해라는 시간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무게를 지닙니다. 긴 고통, 반복된 좌절,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기 어려운 수치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여인은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고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그의 믿음은 완전히 성숙한 형태라기보다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믿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여인은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다”는 헬라어 소조(σῴζω)입니다. 이 단어는 병이 낫는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더 넓게는 구원받다, 온전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그 즉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딸”이라 부르십니다. 사회적으로 밀려났던 여인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 언어 안으로 회복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능력의 원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믿음 자체가 치유를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 연결되는 빈손입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를 받는 도구입니다. 여인을 구원한 것은 여인의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믿음의 크기를 바라보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작은 믿음으로도 붙드는 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관리의 집에 이르셨을 때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십니다. 당시 장례 풍습 속에서 이미 죽음의 분위기가 집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죽음이 최종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죽음은 마지막 주권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것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우실 수 있는 상태로 바라보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십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매우 절제하여 기록합니다. 극적인 묘사를 길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조용한 권세가 더 크게 드러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소란스럽고 무력하지만, 주님은 말씀과 손길로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결정적으로 깨뜨리실 분임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모든 죽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이후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메시아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은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릅니다.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은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주 역설을 보여 줍니다. 보는 자가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가 주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믿음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고 나아온 자들이 그분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립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연약함도 함께 보여 줍니다. 은혜를 경험한 기쁨은 이해되지만,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또 다른 믿음의 문제입니다.

목자 없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추수의 일꾼을 세우시는 왕(마 9:32-38)

두 맹인이 나갈 때 사람들이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옵니다. 귀신이 쫓겨나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됩니다. 무리는 놀라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제 점점 더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고, 소외된 자가 회복되고, 말 못하던 자가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몸과 영혼과 공동체 전체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영적 완고함의 표현입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무리는 놀라워하고, 바리새인들은 비난합니다. 여기서 본문은 기적 자체가 사람을 자동으로 믿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마음이 죄로 굳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도 왜곡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는 외적 증거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가르치심, 전파하심, 고치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시는 선지자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왕이시며, 병든 자를 회복하시는 긍휼의 목자이십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관념이 아니라 죄와 고통으로 무너진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는 창자가 움직일 만큼 깊은 내적 긍휼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얕은 동정이 아닙니다. 죄와 고통 아래 찢기고 방황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입니다. 본문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였다”고 말합니다. “고생하며”라는 표현은 괴롭힘을 당하고 지친 상태를, “기진하였다”는 표현은 내던져진 듯 무력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경에서 목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왕과 지도자의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친히 자기 백성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다윗의 계보에서 참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참 목자로 나타나십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제도 안에 있었지만 참된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해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의 눈으로 보지 않으시고 긍휼의 눈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여기서 “추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 사역을 가리킵니다. 추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자기 소유의 밭을 경영하는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밭에 보냄 받은 일꾼입니다. 따라서 사역의 출발점은 인간적 열심이나 전략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주님은 무리의 필요를 보게 하신 뒤,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단지 다른 사람을 보내 달라는 기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다시 말해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는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보냄 받을 준비를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긍휼의 사역에 연약한 제자들을 참여시키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었지만 부르심을 받았고, 사역할 능력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세움을 받습니다.

결론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며, 병든 자와 죽은 자와 소외된 자를 회복하시는 긍휼의 왕이심을 보여 줍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셨고, 세리 마태에게는 은혜의 부르심을 주셨으며, 혈루증 여인과 죽은 소녀와 맹인들과 말 못하는 사람에게는 회복과 생명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은혜 앞에서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나아오고, 어떤 사람은 완고함으로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능력을 구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를 회복하신 뒤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게 하시고, 추수의 일꾼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붙드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으로 지친 영혼들을 바라보며,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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