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묵상, 11:28-11:37, 나사로의 부활
요한복음 묵상 [11:28-11:37]
서론
요한복음 11장 후반으로 갈수록, 독자는 점점 더 선명한 ‘역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앞 단락(11:17-27)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죽음이 결론이 될 수 없다는, 복음의 정점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11:28-37은 그 정점의 선언이 곧바로 환호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울음과 동요,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교리의 고지”에서 “슬픔의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부활을 말하는 입술이 곧바로 눈물을 멈추게 하지 않는 자리, “생명”을 말해도 여전히 가슴이 무너지는 자리, 그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문맥적으로도 11:28-37은 매우 중요합니다. 11장의 큰 구조에서 11:23-27이 중심이라면(“나는 부활이요 생명”과 마르다의 고백), 11:28-37은 그 중심이 현실의 슬픔과 맞닿을 때 벌어지는 ‘정서적 충돌’을 보여 주는 구간입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더니”(11:19)라는 서론적 언급이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100주년주석은 요한이 “많은 유대인”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그들이 이후 표적의 증인이 되고 믿음 또는 적대의 갈림길에 서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이 단락은 개인적 애도 장면이면서 동시에 공적 증언의 무대입니다.
무엇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왜 울음이 계속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 “예수님이 생명이라면 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시는가?” 요한은 이 질문들을 급히 봉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 질문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심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눈물의 부재가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배우는 길임을 말하려는 듯합니다.
본문 묵상
1) 마르다의 “가만히” 부름, 그리고 슬픔 속의 신앙 전달
마르다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말합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11:28). 여기서 “가만히”라는 묘사는 중요합니다. 집 안에는 조문객들이 많았습니다(11:19, 31). 공개적으로 움직이면 즉시 시선이 쏠리고, 말이 커지고, 상황이 소란해질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슬픔 속에서도 사려 깊게 길을 냅니다. 어떤 믿음은 크게 외치기보다, 조용히 길을 내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헨드릭슨은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고 “마을 언저리에 멈춰 계신” 것처럼 보이는 정황을 언급하며, 예수님이 마르다와 ‘방해 없이’ 대화를 나누신 뒤, 마리아가 잠시 집에 머물도록 두시는 듯한 장면 배치가 두 자매의 성격과도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바쁜 마르다’와 ‘발 앞에 머물던 마리아’의 대비가 여기서도 은은히 겹친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은 사람을 하나의 성격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방식이 드러나는 결을 정직하게 보여 줍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밖으로 나가는 신앙’처럼 보입니다. 움직이며, 알리며, 길을 냅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안에 머무는 신앙’처럼 보입니다. 앉아 있고, 침묵하고, 감정을 가슴에 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낫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두 방식 모두를 만나 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한 인간의 슬픔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처리하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믿음도 성도도,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2) “급히 일어나 나아가니” — 슬픔이 움직일 때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나아가매”(11:29). 슬픔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지만, 어떤 한마디는 그 얼음에 금을 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이 말은 “문제가 해결됐다”가 아니라 “주님이 너를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슬픔 속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각은 ‘잊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십니다. 그 부름은 마리아의 몸을 움직입니다.
여기서 저는 내 안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를 잃은 자리에선 ‘걸음’이 무거워집니다. 밥 먹는 일, 일어나 씻는 일,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다 생존의 노동이 됩니다. 그런데도 어떤 날, 주님의 말씀이 아주 작은 방식으로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너를 부른다.” 그때 신앙은 큰 확신이 아니라, 겨우 한 걸음 더 내딛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3) 조문객들의 오해, 그리고 ‘공동체가 만드는 눈물의 흐름’
“유대인들이…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에 가서 울려 하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라”(11:31). 100주년주석은 요한이 이 “많은 유대인”을 언급하는 이유가, 그들이 표적의 증인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되거나 지도자들의 살해 결의를 촉발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마리아의 걸음은 개인적 애도의 걸음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걸음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공동체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누군가 울면 함께 울고, 누군가 분노하면 함께 분노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회성입니다. 그러나 그 사회성은 때로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는 줄 모르고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 너무 크면, 사람은 모든 움직임을 ‘무덤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상실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미래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다시 무덤이다.”
하지만 복음은 그 해석을 뒤집습니다. 마리아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이 전환이 요한복음 11장의 핵심 긴장입니다.
4) 마리아의 말: 마르다의 말과 닮은, 그러나 다른 온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발 아래 엎드려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32). 이 문장은 마르다의 말(11:21)과 거의 같습니다. 헨드릭슨은 두 자매가 사실상 동일한 문장을 말하는 것을 주목하며, 이것을 신앙의 ‘질책’이라기보다, 사람 편에서 보면 너무 늦은 도착처럼 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마음의 사우침’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문장도 온도는 다릅니다. 마르다의 문장은 대화로 흐르고(설명과 신앙고백으로 이어짐), 마리아의 문장은 엎드림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논리를 세우기보다, 무너진 몸을 그대로 주님께 드립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말보다 자세로 먼저 나타납니다. 때로 우리의 가장 깊은 기도는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무릎이 꺾이는 것이 기도이고, 숨이 막히는 것이 기도이며, 엎드려 “주여…”만 겨우 남는 것이 기도일 때가 있습니다.
5) 핵심 원어 ① κλαίω (클라이오, “소리 내어 울다”) — 인간의 울음이 가진 깊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11:33). 여기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에 사용되는 동사는 κλαίω입니다. 엑스포지터스 주석은 κλαίω가 “소리 내어 울다”를 뜻하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방성대곡하는 통곡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의미: 단순 눈물 맺힘이 아니라, 몸 전체가 흔들리며 터져 나오는 애곡입니다.
문법적 뉘앙스: 요한은 같은 “울다”를 다른 동사로 구분함으로써, 마리아/유대인들의 울음과 예수님의 울음을 질적으로 다르게 보여 줍니다(11:35에서 다른 동사 사용).
신학적 함의: 성경은 인간의 통곡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은 이 통곡을 숨기지 않고 무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슬픔은 ‘경건하지 않은 감정’이 아니라, 타락한 세계의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믿음은 눈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는 길입니다.
우리 시대는 울음을 어색해합니다. 특히 ‘어른의 울음’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울음은 인간다움의 표지입니다. 울지 않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울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 성숙입니다. 요한은 그 붙듦이 어디서 오는지, 곧 예수님의 눈물에서부터 보여 주려 합니다.
6) 예수님의 내면: “민망히 여기시고 비통히 여기시며”
11:33은 예수님의 감정을 강하게 묘사합니다. “심령에 민망히 여기시고 비통히 여기시며.”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에 대해 한국어 독자는 흔히 ‘불쌍히 여김’ 정도로 떠올리지만, 원문은 더 거칠고 강한 내면의 움직임을 담습니다. 자료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앙적 자세에 대해 분노하셨을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슬픔을 마음에 두시고 함께 눈물 흘리시는 인간적 연민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비통히 여기시며’에 해당하는 표현(재귀적 형태로 ‘스스로 동요되다’)은 예수님의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풀이합니다. 헨드릭슨도 11:33의 격정이 단순 분노만이 아니라, ‘마음의 교란 상태’(disturbance)를 포함하는 복합적 감정임을 강조하며, 문맥상 분노라기보다 동정의 요소가 크게 작동한다고 논합니다.
7) 핵심 원어 ② ἐμβριμάομαι / ταράσσω (엠브리마오마이 / 타라쏘, “격동하다/동요하다”)
이 본문을 깊게 읽기 위해서는 11:33의 두 동사 계열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ἐμβριμάομαι(‘민망히 여기다’로 번역되는 자리)
의미: 원래는 강한 격정, 때로는 분노의 숨소리 같은 뉘앙스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문법적 뉘앙스: 단순한 ‘불쌍히 여김’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반응입니다.
신학적 함의: 예수님의 거룩한 격정은 인간의 슬픔 자체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죽음과 상실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계를 향한 저항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최종 모습이 아니다”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분노 어린 슬픔입니다.
ταράσσω(‘비통히 여기다/동요하다’)
의미: 흔들다, 소란케 하다, 마음을 뒤흔들다.
문법적 뉘앙스: 자료가 말하듯 재귀적 형태는 ‘스스로 동요되다’—예수님이 감정을 기계적으로 통제하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흔들리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신학적 함의: 이것이 성육신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장난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부활을 아시면서도, 죽음이 사랑하는 이들과 공동체에 남긴 상처를 실제로 ‘느끼십니다’. 그분의 구원은 차가운 해결이 아니라, 뜨거운 동행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냉소하지 않으시고, 슬픔 앞에서 무감하지 않으시며, 동시에 그 슬픔에 함몰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격동하시되 목적을 잃지 않으십니다. 감정의 깊이와 사명의 선명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8) “어디 두었느냐” — 기적의 신학이 아니라, 관계의 신학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11:34). 사람들은 답합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자료는 “와서 보옵소서”가 현장 확인, 사실 확인의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위치를 모르셔서 묻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종종 아시면서도 묻습니다. 그 질문은 정보 수집이 아니라, 관계의 참여입니다. “어디 두었느냐”는 “너희의 슬픔 자리로 내가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이미 다 아시니’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말하게 하십니다. 아시지만, 보여 달라 하십니다. 아시지만, “와서 보옵소서”라는 우리의 초대를 받으십니다. 신앙은 결국 ‘전능한 지식’의 교리가 아니라, 함께 걷는 길입니다.
9)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가장 짧은 절, 가장 깊은 하나님
11:35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 중 하나지만, 가장 긴 묵상을 낳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서 요한은 마리아/유대인들의 울음(κλαίω)과 예수님의 울음을 다른 동사로 구분합니다. 자료는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시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δακρύω(다크뤼오) 계열이며, 신약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하고, 오직 주님께 대해서만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κλαίω가 방성대곡의 통곡이라면, δακρύω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울다”라는 뜻을 갖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는 이 눈물이 단지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몰이해를 향한 동정과 사랑을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입니다. 헨드릭슨 역시 11:35의 동사가 성경에서 유일하게 쓰인다는 점과, 예수님의 눈물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 약속과 연결된다는 점을 언급하며, “그의 눈물 때문에 우리의 눈물도 씻겨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10) 핵심 원어 ③ δακρύω (다크뤼오, “눈물을 흘리다”)
의미: 울부짖는 통곡이 아니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입니다. 감정이 절정이어서라기보다, 감정이 너무 깊어서 말이 사라진 상태에 가깝습니다.
문법적 뉘앙스: 요한이 이 동사를 단 한 번만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인간성’의 절정처럼 독특하게 부각합니다.
신학적 함의: 성육신은 “인간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을 실제로 짊어지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전능이 약해졌다는 표지가 아니라, 전능이 사랑이 되었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결코 무력한 눈물이 아닙니다. 그 눈물은 곧 무덤 앞에서 돌을 굴릴 권세로 이어질 눈물입니다.
여기서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의 신앙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종종 ‘믿음이 있으면 울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믿음이란 눈물을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드는 힘입니다.
11) 유대인들의 해석: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사람들이 말합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11:36).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사랑의 증거’로 읽습니다. 그 해석은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입니다. 다만 그들이 아직 모르는 것은, 이 사랑이 단지 애도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찢고 들어갈 구속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봅니다. 우리는 사랑을 ‘느낌’으로만 이해하지만, 복음의 사랑은 ‘행동’이며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로 시작해, 십자가로 완성됩니다. 그 사랑은 동정으로 머물지 않고,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12) 또 다른 유대인들의 질문: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11:37). 이 질문은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을 다시 끌어옵니다. 즉, 요한복음은 표적을 서로 연결시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누적된 증거로 삼습니다. 한편 이 질문에는 진짜 궁금증과 은근한 비난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서 왜 여기서는 막지 않았나?”
이 질문은 지금도 그대로 울립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 일을 막지 않으셨나?” 믿음의 길에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대개 ‘전능’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질문입니다. 전능하시면 왜 막지 않으셨나. 사랑하시면 왜 늦으셨나. 요한복음 11장은 그 질문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눈물로 그 질문을 품으신 뒤, 무덤 앞에서 그 질문을 ‘행동’으로 답하십니다. 복음은 설명을 줄 때도 있지만, 더 자주 사건으로 답합니다.
13) 구속사적 흐름으로 연결하기: 창조–타락–언약–그리스도–교회–새 창조
이 본문은 구속사의 큰 흐름 속에서 더욱 빛납니다.
창조: 하나님은 생명을 선물로 주셨고, 죽음은 창조의 본래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타락: 죽음과 상실과 눈물이 세계의 공기가 되었습니다. 베다니의 통곡(κλαίω)은 타락 세계의 현실입니다.
언약: 하나님은 언약으로 “마지막 날 부활”의 소망을 심으셨지만, 그 소망은 종종 슬픔의 현실 앞에서 멀게 느껴집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소망을 ‘먼 약속’에서 ‘가까운 임재’로 옮기십니다. 그리고 그 임재는 눈물(δακρύω)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성육신의 표지이며, 동시에 죽음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저항입니다(ἐμβριμάομαι/ταράσσω의 격동).
교회: 교회는 이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상실한 자와 함께 울며, 동시에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위로만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현장’으로 가는 공동체입니다(“와서 보옵소서”).
새 창조: 예수님의 눈물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헨드릭슨이 말하듯 “그의 눈물 때문에 우리의 눈물도 씻겨질 것”이라는 약속은, 새 창조에서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씻기시는 장면과 맞닿아 있습니다. 새 창조는 눈물이 금지된 세계가 아니라, 눈물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계입니다.
14) 존재론적 묵상: “나는 어떤 울음으로 살아가는가”
이 본문은 제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저는 지금 어떤 울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κλαίω의 울음—통곡, 억제되지 않는 슬픔, 삶이 무너지는 울음—이 제 삶에 있다면, 그 울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 울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울음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 저는 예수님의 δακρύω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약함’으로 보지 않고, ‘사랑의 진짜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강한 하나님만 원합니다. 문제를 즉시 제거하는 하나님, 눈물을 멈추게 하는 하나님. 그러나 요한은 먼저 “함께 우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그 다음에 “죽음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왜 막지 않으셨나”(11:37)라는 질문을 품고 있을 때, 그 질문이 저를 하나님께서 멀어지게 합니까, 아니면 더 가까이 가게 합니까?
같은 질문이라도 방향이 다릅니다. 원망의 질문은 하나님을 심판하지만, 기도의 질문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마리아는 엎드린 채 질문합니다. 그 자세가 제게 길이 됩니다. 이해가 없어도, 설명이 없어도, 엎드릴 수 있다면 아직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묵상적 결론
요한복음 11:28-37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위대한 선언이, 인간의 통곡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엎드려 말하고, 사람들은 무덤을 향해 움직이며, 예수님은 격동하시고(ἐμβριμάομαι/ταράσσω) 결국 눈물을 흘리십니다(δακρύω). 이 흐름은 우리에게 신앙의 균형을 가르칩니다.
첫째, 참 믿음은 슬픔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둘째, 참 하나님은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동요하시고 함께 우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눈물은 ‘체념’이 아니라 ‘구원의 전주곡’입니다. 무덤 앞에서 하나님은 먼저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고, 그 사랑은 마침내 죽음 자체를 흔드는 권세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묵상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싶습니다. 주님, 제 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눈물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제 눈물이 주님께 도착하게 하시고, 주님의 눈물이 제 삶을 다시 일으키게 하옵소서. 슬픔이 결론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저는 무덤이 아니라 주님께로 걸어가고 싶습니다.
기도문
주님, 저는 상실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때로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로 주님을 원망하듯 바라본 적이 많습니다. 제 마음의 조급함과 판단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예수님, 베다니에서 우시던 주님의 눈물을 제게도 들려주옵소서. 제 눈물이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통곡 속에서도 엎드려 기도할 힘을 주옵소서. 또한 주님처럼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 줄 아는 마음을 제게 주셔서, 차가운 말로 재단하지 않고 따뜻한 임재로 동행하게 하옵소서. “왜 막지 않으셨나”라는 질문이 저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말게 하시고, 오히려 더 깊이 매달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제 슬픔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이 생명이심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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