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묵상, 11:1-11:16, 나사로의 부활
요한복음 묵상 [11:1-11:16]
서론
요한복음 11장은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에서 하나의 분수령입니다. 앞선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시며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진짜 의미를 드러내셨고, 10장에서는 “문”과 “선한 목자”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양을 살리는 분과 양을 버리는 권력을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10장 끝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적대가 거세지자 요단강 저편으로 물러나 계셨습니다(10:40-42). 11장 1-16절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이 다시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로 향하시는 결단을 보여 줍니다. 100주년주석은 이 단락(10:40-12:11)을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큰 연속으로 배열하면서, 10장 마지막의 “요단강 너머 베다니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는 장면 다음에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심”이 이어지고, 그 결과로 지도자들의 죽이려는 모의가 촉발된다고 정리합니다. 그러니 11장은 단지 ‘놀라운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역사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서사의 시작을 매우 인간적으로 엽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11:1). 병, 가족, 마을, 그리고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11:3)라는 간절한 소식. 이것은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삶의 급한 파열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도, 결국 믿음은 이런 파열 속에서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기도했는데 곧장 응답되지 않는 시간, 사랑이 분명한데도 지연되는 걸음,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질 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 11:1-16은 바로 그 “지연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영광, 그리고 제자들의 두려움과 오해가 동시에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본문 묵상
1) 베다니, 이름들이 가진 온기, 그리고 ‘상황의 무게’
요한은 인물과 장소를 매우 구체적으로 재정의합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살며(11:1),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11:2)로 미리 소개됩니다. 100주년주석은 11장 이야기 속에 치밀한 병행구조가 있음을 보여 주며, (aa) 예수의 오심, (bb) 마르다의 만남, (cc) “나는 부활이요 생명” 선언, (b’b’) 마리아의 만남, (a’a’)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옴이라는 흐름을 제시합니다. 즉 요한은 나사로의 사건을 ‘감정 폭발’로만 기록하지 않고, 구속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정교하게 배열합니다.
또한 자료는 베다니가 예루살렘 동남쪽 약 3km 지점(대략적 거리)이며 감람산 기슭에 있고, 당시에 예수님이 머물던 ‘요단 동편 베다니’(요 1:28, 10:40)와 구분될 필요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단지 지리 정보가 아니라 긴장 정보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가려는 곳은 단순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권력과 가까운 위험지대입니다.
이때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이 마음을 붙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소식을 보내며,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자”(11:3)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위급할 때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그 시작이 우리의 신앙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논리를 대지 않습니다. 공로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관계를 말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믿음은 결국 이런 부름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직 끊어지지 않은 끈이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 끈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 말입니다.
2) 핵심 원어 ① ἀσθένεια (아스데네이아, “병/연약함”)
11:4에서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병’(헬라어로 흔히 ἀσθένεια)은 단지 의학적 질환이 아니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연약함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의미: ἀσθένεια는 ‘힘이 없음’(a- + sthenos)이라는 뿌리를 갖고,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문법적 뉘앙스: 예수님의 말씀은 병의 현재 상태를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병의 궁극적 결말을 재정의하는 선언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다”는 말은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사건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목적을 가진다는 뜻으로 읽혀야 합니다(곧 11:14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신학적 함의: 연약함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오해하게도 만듭니다. 연약함의 압력 속에서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다면, 지금쯤 막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연약함을 ‘하나님 부재의 증거’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자리로 가져갑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 선언, 그리고 사랑의 지연
예수님은 소식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11:4). 100주년주석은 이 구절을 본문 전체 구조의 초입에서 강조하며, 나사로의 병과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유상섭도 요한복음의 핵심 연결고리로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과 “아들이 영광 받는 것”이 분리되지 않으며, 예수님이 나사로 사건에서 이미 그 상호 연결을 말씀하셨다고 짚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이 우리의 마음을 가장 혼란스럽게 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11:5-6). 사랑하시는데 지연하십니다. 사랑하시는데 머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가장 깊은 질문 앞에 섭니다. 사랑과 지연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즉각성’으로 이해합니다. 사랑이면 빨리 와야 합니다. 사랑이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사랑이면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시계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은 “사랑하시더니… 이틀을 더 유하시고”를 한 문장처럼 붙여 놓습니다. 이 지연은 무관심이 아니라, 더 큰 계시를 위한 시간입니다. 다만 그 시간은 당사자에게 너무 길고, 너무 어둡게 느껴집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합니다. 기도는 했는데 상황이 더 악화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사실은 사랑을 의심한다기보다, 사랑의 방식이 내 방식과 다르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믿음은 “사랑하심”이라는 문장을 붙들고, “더 유하심”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는 훈련인지도 모릅니다.
4) 핵심 원어 ② δόξα (독사, “영광”)
11:4에서 핵심 단어는 δόξα입니다.
의미: δόξα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엄과 현현, 그리고 그분의 가치가 드러나는 ‘광휘’를 포함합니다. 단지 명성이나 칭찬의 의미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문법적 뉘앙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표현은 사건의 목적성을 선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감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위한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 주는 창입니다.
신학적 함의: δόξα는 요한복음에서 특히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영광은 박수갈채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여 생명을 내어주는 자리에서 가장 깊게 드러납니다. 나사로 사건은 영광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됩니다(뒤이어 11:45-57에서 지도자들의 모의가 본격화됩니다). 그러므로 11:4의 영광은 ‘기적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밝아지는 빛’입니다. 영광은 눈부시지만, 그 눈부심은 종종 고통의 그림자와 함께 옵니다.
5) “유대로 다시 가자” — 위험을 향한 걸음, 낮과 밤의 비유
이틀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11:7). 제자들은 즉각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11:8). 10장에서 돌을 들었던 사건(10:31-39)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뜻밖의 방식으로 대답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11:9-10). 이 말씀은 9-10장에서 이미 강조된 “빛”의 주제가 다시 울리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위험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다만 위험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하십니다. 지금은 ‘낮’이며,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 안에서 걷는 길은 어둠이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안전한 선택’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전이 아니라 순종을 따라 걸으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걸음은 때로 위험을 향해 나아갑니다. 믿음은 위험을 무시하는 무모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내 삶의 시간표를 지배하도록 내어드리는 태도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합리적이지만, 그 합리성이 결국 “가지 말자”로 흐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합리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더 큰 질서—하나님의 때와 빛—를 제시하십니다.
6)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죽음을 부르는 다른 언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제자들은 오해합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1:12). 그러자 요한은 해설합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잘 때를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11:13). 결국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14).
여기서 예수님이 죽음을 “잠”으로 부르신 언어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마지막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죽음이 너무 무섭기에, 인간은 죽음을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외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11:14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또렷이 발음하십니다. 다만 그 죽음에 붙들리지 않으십니다. 죽음은 예수님 앞에서 ‘절대자’가 아니라 ‘깨어날 수 있는 잠’이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언어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합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내 영혼의 방향을 정합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십니다. 물론 우리에게 죽음은 여전히 통증이며, 이별이며, 눈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이 언어의 전환이야말로 복음의 깊은 힘입니다.
7) 핵심 원어 ③ κοιμάομαι / ὕπνος (코이마오마이/휘프노스, “잠들다/잠”)
11:11-13의 중심 동사는 ‘잠들다’에 해당하는 κοιμάομαι(또는 ‘잠’ ὕπνος)의 어휘 영역입니다.
의미: κοιμάομαι는 문자 그대로 잠을 자다이지만, 성경에서는 종종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완곡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을 암시하는 신학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문법적 뉘앙스: 제자들의 오해는 단어의 일상적 의미에 갇혔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요한은 해설을 달아 독자에게 “예수는 죽음을 말한 것”이라고 분명히 합니다(11:13). 즉, 본문은 ‘오해—해설—명료화’의 구조로, 예수님의 언어가 얼마나 다른 차원의 현실을 가리키는지 보여 줍니다.
신학적 함의: 죽음을 잠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활은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주권자이시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를 향한 방향표입니다.
8) “너희를 위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 — 믿음의 성숙을 위한 낯선 기쁨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11:15).
이 말은 처음 읽으면 마음이 걸립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죽어 가는 현장에 계시지 않았던 것을 왜 ‘기뻐’하십니까? 그러나 이 기쁨은 잔인한 기쁨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한 단계 성숙할 것을 바라보시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지금 당장” 믿음을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의심 없는 믿음, 문제 없는 믿음.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도록, 때로는 불가피한 통과의례를 허락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장난처럼 “교육 도구”로 쓰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눈물을 흘리십니다(11:35). 주님은 고통을 냉정하게 관리하는 분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 들어와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눈물에 갇히지 않고, 생명의 권세를 드러내십니다.
믿음은 눈물과 영광 사이에서 자랍니다. 믿음은 “사랑하시더니 지연하셨다”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을 통과하며, 결국 “주께서 참으로 사랑하셨다”는 더 깊은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9) 도마의 한마디, 두려움과 충성의 뒤섞임
마지막으로 도마가 등장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1:16). 자료는 도마가 ‘쌍둥이’라는 뜻이며, 여기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할 정도로 의리 있고 열정적인 면을 보여 준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헨드릭슨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도마의 말이 “나사로와 함께 죽으러”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으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논증합니다. 즉 제자들이 유대로 가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의 위험으로 보았고, 도마는 그 위험을 알면서도 주님과 함께 가겠다는 결의를 말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동시에 헨드릭슨은 도마의 의사가 진지했을지라도, 실제 위협이 닥쳤을 때 그 용기가 무너진다는 사실(제자들이 도망한 사건)도 함께 상기시키며, “행동보다 뜻이 더 좋을 때가 많다”는 인간의 복합성을 보여 줍니다.
저는 도마가 참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그의 말에는 충성이 있고, 동시에 비관이 섞여 있습니다. “가자”는 결단과 “죽으러”라는 어두운 예감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실상과 닮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두렵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동시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도마는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믿음은 완벽한 감정 상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있지만 “가자”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10) 핵심 원어 ④ φίλος (필로스, “친구”)
예수님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부르십니다(11:11). 여기서 ‘친구’는 φίλος의 어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미: φίλος는 단순한 지인보다 깊은 관계적 친밀을 담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거대한 공적 운동이지만, 그 운동은 늘 구체적 관계를 품고 흘러갑니다.
문법적 뉘앙스: “우리 친구”라는 표현은 제자들도 함께 포함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만의 친구가 아니라, 제자들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곧 공동체의 관계가 사건의 배경이 됩니다.
신학적 함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익명의 구제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위해 가시듯,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길을 건너오십니다. 이 ‘친구’라는 단어는 십자가의 언어로도 이어집니다. 사랑은 결국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데까지 갑니다(요 15:13). 나사로 사건은 그 사랑의 ‘예고편’처럼 우리 앞에 놓입니다.
11) 구속사적 흐름으로 읽기: 창조–타락–언약–그리스도–교회–새 창조
창조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좋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의 삶에는 병(ἀσθένεια), 지연, 죽음이 스며들었습니다. 죽음은 단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이 낳은 세계의 균열로 경험됩니다. 언약은 그 균열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백성을 붙드시는 약속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요한복음 11장 초입에서 예수님은 병과 죽음을 ‘설명’하기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δόξα)을 드러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죽음의 세계 한복판에서 생명의 주권을 드러내시는 구속사적 행동입니다.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도 오해하는 제자들처럼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이 결국 믿음으로 자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1:15). 그리고 새 창조는 죽음이 잠처럼 뒤집히는 세계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깨어남이 되는 세계, 눈물의 언어가 부활의 언어로 전환되는 세계입니다. 11:1-16은 그 새 창조를 향한 거대한 사건의 문을 여는 서두입니다.
12)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하기: 지연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 본문은 우리를 ‘교훈’으로만 보내지 않고, 존재의 질문 앞에 세웁니다.
저는 지연 속에서 누구입니까?
사랑을 믿는 사람입니까, 사랑을 계산하는 사람입니까?
“사랑하시더니 이틀을 더 유하시고”(11:5-6)라는 문장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제 안에서 사랑은 항상 즉시성과 동일시되어, 지연은 곧 거절로 번역됩니까?
그리고 저는 죽음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세상의 언어대로 “끝”이라고 부릅니까, 예수님의 언어대로 “잠”이라고 부르려 애씁니까? 물론 ‘잠’이라고 부른다고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언어는 슬픔의 바닥에 작은 빛을 심습니다. “깨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빛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위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제자들처럼 합리적 두려움에 머뭅니까, 아니면 도마처럼 비관과 두려움이 섞여도 “가자”라고 말합니까? 헨드릭슨이 말하듯, 우리의 의지가 늘 행동으로 완벽히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우리를 데리고 길을 나서십니다. 믿음은 완성품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만들어지는 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며, 믿음의 내면이란 결국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붙드는 싸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삶이 급박할수록 사랑은 의심받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을 먼저 말하고(11:5), 그 사랑이 지연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임을 보여 줍니다. 그 지연이 우리를 더 깊은 영광으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서두에서부터 조용히 암시합니다.
묵상적 결론
요한복음 11:1-16은 아직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과 지연, 오해와 두려움, 그리고 위험을 향한 발걸음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서두만으로도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랑은 현실의 지연과 모순되어 보일 때도 실제로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조차 다른 언어로 부르게 할 만큼 강력하며, 그 언어는 결국 현실을 바꾸는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제자들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오해를 통과하며 성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서두를 통해, “믿음의 시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합니다. 믿음의 시간은 기적이 일어난 순간만이 아닙니다. 믿음의 시간은 오히려 예수님이 ‘아직 오지 않으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러나 여전히 사랑을 붙드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그 시간을 헛되게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11:15)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연의 시간은 멈춤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묵상은 이렇게 끝맺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사랑을 제 시계로 재단하지 않게 하옵소서. 당신의 영광은 제 조급함보다 깊고, 당신의 걸음은 제 계산보다 정확합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이 “가자” 하실 때 함께 일어나 걷게 하옵소서.
기도문
주님, 저는 급한 상황 앞에서 쉽게 흔들리며, 사랑을 믿기보다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사랑하시더니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말씀 앞에서 제 마음이 조급해지고, 응답의 지연을 거절로 오해했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예수님, 제게 믿음을 주옵소서. 병과 죽음의 소식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때와 주님의 길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두려움이 밀려올 때 도마처럼 “가자”라고 말할 작은 담대함을 주시고, 무엇보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제 삶의 지연과 눈물의 시간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내딛게 하시고, 결국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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