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묵상,10:22-10:42,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다

 

요한복음 묵상 [10:22-10:42]

서론

요한복음 10:22-42는 ‘선한 목자’ 담화(10:1-21)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예수님을 둘러싼 적대가 다시 한 번 정면으로 폭발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단락은 단지 “유대인들이 또 시비를 걸었다”는 반복이 아닙니다. 9장에서 맹인이 눈을 뜬 사건 이후, 회당 권력은 한 사람을 출교시키며(9:34) 자신들의 질서를 지키려 했고,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며 참된 소속을 열어 주셨습니다. 곧이어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요 “선한 목자”로 계시하시며, 양을 버리는 삯꾼과 절도·강도를 고발하셨습니다. 10:22-42는 그 고발이 어떤 반응을 불러오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그 반응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증언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특히 본문은 시간과 절기, 장소를 명확히 고정합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10:22). 수전절은 성전이 더럽혀졌다가 다시 정결하게 봉헌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자료는 그 유래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힌 뒤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회복·재봉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초막절(7–8장)과 수전절(10:22) 사이가 약 3개월 정도라는 시간적 간격도 언급합니다. 요한은 이 간격을 통해, 예수님의 계시가 ‘한 번의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절기와 계절을 가로질러 누적되는 긴 충돌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장소는 “솔로몬 행각”입니다(10:23). 자료는 솔로몬 행각이 성전 동쪽 경내에 있던 주랑(기둥들이 늘어서고 지붕이 덮인 복도)이며, 겨울철 추위와 절기 인파 때문에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쉬웠을 것이라 설명합니다. 신앙의 질문은 종종 추상적 교실이 아니라, 차가운 바람이 부는 현실 한복판에서 던져집니다. 겨울의 성전, 절기의 군중, 그리고 “그리스도면 밝히 말하라”는 압박. 이 본문은 그 압박 속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가 어디까지 선명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묵상자로서 저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신앙이 흔들릴 때, 혹은 삶이 불안할 때, “확실히 말해 달라”는 요구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그 요구는 때로 진리를 향한 갈망이라기보다, 내 불안을 빨리 잠재우려는 조급함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조급함이 어떻게 믿음이 아니라 적대로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끝까지 붙드시는지 보여 줍니다.

본문 묵상

1) 수전절의 아이러니: ‘봉헌’ 절기 안에서 드러나는 참된 거부

수전절은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봉헌한 절기’입니다. 기름을 밝히는 전통 때문에 ‘빛의 축제’로도 불렸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빛의 절기’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돌을 드는 장면을 배치합니다. 봉헌을 기념하는 절기에서, 성전의 주인이신 분을 거부합니다. 정결을 말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일을 죄로 규정합니다. 이 아이러니는 요한복음 전체의 역설과 맞닿아 있습니다.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현실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의 그림자를 봅니다. 경건은 종종 ‘기억’과 ‘의식’으로 보존됩니다. 기억과 의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기억이 살아 있는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의식이 하나님을 대신할 때입니다. 수전절의 봉헌은 원래 하나님을 향한 회복의 기억이었을 텐데, 그 기억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거부하는 방패가 됩니다. 신앙이 본래의 목적을 잃으면, 가장 거룩한 언어가 가장 완강한 거부로 변합니다.

2)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라는 질문의 속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말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10:24). 박상돈은 이 질문이 유대인들의 답답함을 드러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에도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고 짚습니다.
표면적으로 이 질문은 ‘명확한 고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문제는 예수님이 अस्पष्ट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10:25). 요한은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어떤 불신은 정보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 문제입니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증거를 받아들일 의지가 없어서 생기는 불신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우리 안에서도 자주 울린다는 것을 봅니다. “주님, 확실히 보여 주십시오. 확실히 말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 이 ‘그러면’ 속에 숨은 조건이 우리의 진짜 상태를 드러냅니다. 믿음은 증거가 생겨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닫힌 채 “더 확실히”만 요구하면, 확실함은 믿음을 낳기보다 더 큰 적대를 낳을 수 있습니다.

3) 핵심 원어 ① ἐγκαίνια (엥카이니아, “수전절/봉헌”)

  • 의미: ἐγκαίνια는 ‘새롭게 하다, 봉헌하다’(renew/dedicate)의 뜻을 가진 단어에서 왔습니다. 성전을 다시 ‘새롭게’ 봉헌하는 절기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자료도 수전절이 ‘Dedication’(봉헌)의 절기임을 밝힙니다.

  • 문법적 뉘앙스: 요한은 단순 달력 정보가 아니라, 이 절기의 성격을 배경으로 예수님 논쟁을 배치합니다. ‘봉헌’ 절기의 한가운데서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10:36)로 자신을 말하실 때, 봉헌의 참 뜻이 드러납니다.

  • 신학적 함의: 참된 봉헌은 건물을 정결케 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보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봉헌 절기에 봉헌 받으실 분을 거부하는 순간, 봉헌은 껍데기가 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성전의 의미는 새 창조로 열립니다.

4) 예수님의 대답: 말과 일, 그리고 “증거”의 신학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10:25)이라고 하십니다. 100주년주석은 10:22-39에서 “증거”의 주제가 매우 뚜렷하며, 예수님이 10:25-30에서 메시야 되심을, 10:30과 10:34-38에서 아들 되심을 강렬하게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감정적 설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의 누적된 증거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문장으로 칼같이 정리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10:26). 이 말은 잔인하게 들릴 수 있으나, 요한복음의 논리에서는 ‘양이기 때문에 듣는다’기보다 ‘듣고 따르기 때문에 양으로 드러난다’는 관계의 흐름이 있습니다. 즉, 믿음은 혈통이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에 대한 반응으로 드러납니다.

5)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의 위로가, 왜 공격의 불씨가 되는가

예수님은 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이어 “내 아버지…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10:29).
이 말씀은 본래 위로입니다. 그러나 위로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참 위로는 인간의 안전장치를 무너뜨립니다. 회당이 부여하는 안정, 제도가 제공하는 승인, 다수의 시선이 만들어 주는 소속감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이 숨 쉴 구멍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말입니다. 그 위협이 10:30에서 폭발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6) 핵심 원어 ② ἕν (헨, “하나”)

  • 의미: 10:30의 “하나”는 헬라어 ἕν입니다. 자료는 이 ‘하나’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체임을 증거하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 문법적 뉘앙스: ἕν은 남성(heis)이 아니라 중성(hen)입니다. 이는 ‘한 인격’이라는 단순 동일시가 아니라, 본질적 연합과 일치(본질의 하나 됨)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자료도 예수의 신성을 “존재론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 요 10:30)”과 “기능론적 종속성(functional subordination)”이라는 두 측면에서 설명하며, 10:30은 전자를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 신학적 함의: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들렸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니시라면, 그분의 손이 우리를 영원히 붙드신다는 약속도 공허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하나이시기에, 그 손은 절대 놓치지 않는 손이 됩니다.

7) 돌을 든 이유: “선한 일”이 아니라 “참람함”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1). 그들은 예수님의 선한 일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10:33). 100주년주석은 이 장면이 8:59의 돌질 시도와 병행되며, 유대인들이 예수의 신성 언급을 분명히 들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합니다.
여기서 저는 인간의 딜레마를 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보면서도, 그 선함이 내 세계관을 흔들면 선함을 선함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선함이 내 권력을 위협하면, 선함은 죄목이 됩니다. 사랑이 내 자리를 바꾸면, 사랑은 위험이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선한 일”을 부정하기보다 “그 선한 일을 행한 자”를 제거하려 합니다. 신앙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순간입니다.

8) 핵심 원어 ③ βλασφημία (블라스페미아, “참람함/신성모독”)와 돌질의 ‘의지적 현재’

  • 의미: 유대인들이 말한 “참람함”은 통상 βλασφημία(신성모독)의 범주입니다.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을 인간에게 돌리는 죄목입니다.

  • 문법적 뉘앙스: 자료는 10:32의 “돌로 치려하느냐”에 해당하는 동사가 ‘의지적 현재 능동태’(conative present)로, “돌로 치려고 애쓰느냐/시도하느냐”라는 뉘앙스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들은 거의 돌을 던지려는 찰나였다는 것입니다.

  • 신학적 함의: 신성모독이라는 칼날은 경건의 이름으로 휘둘러질 때 가장 무섭습니다. 법이 신앙을 지키는 울타리여야 하는데, 도리어 법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기가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 비극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오늘에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며 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억누르는 순간, 우리는 신성모독을 미워하면서도 정작 더 깊은 신성모독—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는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9) 예수님의 성경 해석: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는 안전장치

예수님은 시편 82편을 인용하며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0:34)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10:35)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용해 ‘꼼수’로 빠져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자료도 예수님이 필요할 때마다 구약 성경이 자신에 관하여 예언하고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셨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결코 구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참 두렵고도 귀합니다. 성경을 손에 쥐고 성경을 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는 말은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성경을 가진 자의 교만을 꺾습니다. 성경은 내 편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내 정답을 확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 앞에서 내 어두움을 들키는 일입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그 일은 믿으라”

예수님은 논쟁을 다시 ‘증거’로 돌리십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10:37-38). 이것은 놀라운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을 아시면서도, 믿음으로 들어올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한 일을 보아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10:38). 100주년주석은 이 구절들이 초막절 논쟁(7–8장)과 병행하며, 예수님이 자기 신성의 주장과 변증을 다시 수행하는 자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이 얼마나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실에 기반하는지 봅니다. 믿음은 비약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는 아들’을 보고, 그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11) 잡으려 하나 벗어나 가시니라: ‘때’의 신학과 하나님의 주권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10:3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종종 붙잡히지 않으십니다.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폭력이 무제한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확신과 분노로 달려들지만, 구속사는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단강 너머로 가사… 거기 거하시니”(10:40)라고 합니다. 100주년주석은 10:40-42가 새로운 연속의 시작이 되며, 요단강 너머 베다니(요 1:28의 배경)를 언급함으로 11장(나사로 사건)으로 이어지는 문학적·상황적 연결고리를 마련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의 적대가 높아지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물러나시되, 단지 도망치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구속 사건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은 ‘우연한 체포’가 아니라, ‘정해진 때에 스스로 내어주시는 길’입니다.

12) 마지막 장면의 고요한 결실: “많이 믿더라”

“많은 사람이 요단강 너머로 와서 말하되 요한은 표적을 행한 것이 없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10:41).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더라”(10:42).
이 결말이 참 묘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돌이 들려지고, 요단강 너머에서는 믿음이 자랍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표적을 본 자들’이 완강해지고, 요단강 너머에서는 ‘표적을 행하지 않은 요한의 증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믿습니다.
여기에는 존재론적 질문이 생깁니다. 저는 무엇을 근거로 믿고 있습니까?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이미 주어진 증언을 “참이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까? 우리는 종종 더 강한 자극, 더 확실한 체험, 더 압도적 증거를 구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결국 믿음은 ‘주어진 빛을 사랑하는가’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증언에도 마음이 열립니다. 빛을 미워하는 사람은 큰 표적 앞에서도 눈을 감습니다.

13) 구속사적 흐름으로 연결하기: 창조–타락–언약–그리스도–교회–새 창조

창조는 하나님의 빛과 질서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누리도록 지음 받았으나 타락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어두움을 낳았습니다. 어두움의 특징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반역입니다. 언약은 그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성전과 절기를 통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역사입니다. 수전절의 배경이 ‘성전의 회복’이라는 점은, 언약 공동체가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했던 몸부림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표지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드러내시고(10:30), 아버지의 일을 통해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교회는 이 증거를 받아들여 “예수는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예루살렘처럼 적대가 거세고, 때로는 요단강 너머처럼 조용한 믿음이 자랍니다. 새 창조는 결국 이 ‘하나 됨’의 완성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10:38)라는 연합의 언어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피조세계의 회복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참된 봉헌(ἐγκαίνια)은 건물의 정결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14) 묵상의 확장: ‘밝히 말하라’는 요구 뒤에 숨은 내 마음

이 본문을 오래 묵상하면,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는 문장이 제 안에서 자꾸 메아리칩니다. 저는 예수님께 솔직히 그런 요구를 한 적이 많습니다. 주님, 제 인생이 왜 이렇습니까. 주님, 당신이 살아 계시면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주님, 애매하게 하지 말고 확실히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하셨고”, 이미 “일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의 방향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국 ‘정보의 추가’가 아니라 ‘관계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표적을 주시기보다, 이미 행하신 일들을 “증거”로 제시하시고(10:25),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제 삶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 됩니다. 저는 어떤 음성을 오래 듣고 있습니까? 세상의 조급한 음성입니까, 혹은 목자의 음성입니까? 두려움의 음성입니까, 혹은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는 약속의 음성입니까?
그리고 더 깊게는, 저는 어떤 하나님을 원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불안을 즉시 잠재워 주는 ‘정답 제공자’로서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내 세계관을 흔들어 새 사람을 만드시는 ‘빛’으로서의 하나님입니까? 전자는 편하지만, 후자는 구원입니다.

묵상적 결론

요한복음 10:22-42는 겨울의 성전에서 터진 가장 뜨거운 충돌을 보여 줍니다. 수전절이라는 ‘봉헌의 절기’가 오히려 거부의 절기가 되는 비극 속에서, 예수님은 더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한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일은 믿으라.”
이 단락의 핵심은 단순히 “예수님이 신성을 주장하셨다”는 교리적 진술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술이 우리의 존재를 가르는 칼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선언은,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손으로 자신을 붙들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의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빼앗으려 하지만 “빼앗을 자가 없다”는 약속은 우리의 실존을 새로 세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약속은 우리의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밝히 말하라”는 요구가 사실상 “내 방식대로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구일 때, 우리는 진리를 찾는 듯하면서도 진리를 거부합니다. 결국 본문은 한 가지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저는 예수님을 진짜로 알고 싶습니까, 아니면 제가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확인받고 싶습니까? 전자는 믿음으로 가는 길이고, 후자는 돌을 드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조용한 희망을 남깁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을 때, 요단강 너머에서 “많이 믿더라”(10:42). 적대가 모든 것을 덮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다른 자리에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겨울이 영원하지 않듯, 거부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계속 증언하고, 증언은 누군가의 마음에서 빛을 켭니다. 오늘 제가 할 일은 단순합니다. 더 큰 확실함을 요구하기 전에, 이미 주신 말씀과 일 앞에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양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하옵소서.”

기도문

주님, 저는 불안할 때마다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소서”라고 조급하게 요구하며, 이미 주신 말씀과 일의 증거 앞에서도 믿지 못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제 안의 완고함과 조건부 순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 제 신앙이 감정의 요동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붙들린 확신 위에 서게 하옵소서. 세상의 소리와 두려움의 소리가 커질수록 목자의 음성을 더 또렷이 듣게 하시고, 주님의 일들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보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또한 ‘봉헌’의 절기처럼 제 삶도 주께 새롭게 드려지게 하시며, 제가 성전의 주인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환영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제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응답하기를 결단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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