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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편 강해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도입: 시편 10편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드리는 믿음의 탄식입니다 시편 10편은 매우 현실적인 시편입니다. 시편 9편이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라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찬양했다면, 시편 10편은 곧바로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 질문은 신앙 없는 사람의 냉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현실의 악 앞에서 느끼는 깊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교만한 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가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멀리 계신 것처럼 보입니까? 왜 환난 때에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까?” 시편 10편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 언어를 줍니다. 신앙은 고통스러운 질문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묻는 탄식을 허락합니다. 다만 그 질문은 하나님을 떠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질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탄식입니다. 시편 10편의 특징은 악인의 내면과 행동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한다는 점입니다. 악인은 교만합니다. 가난한 자를 박해합니다. 탐욕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보지 않는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자처럼 숨어 있다가 힘없는 자를 잡고, 자기 그물로 가난한 자를 끌어갑니다. 시편 기자는 악을 막연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심리, 언어, 행동, 사회적 폭력까지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2절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

시편 9편 공의의 보좌

  공의의 보좌 도입: 시편 9편은 감사와 탄원이 함께 흐르는 시편입니다 시편 9편은 다윗의 감사시이면서 동시에 탄원시입니다. 앞부분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 악인의 횡포, 하나님께 다시 일어나 달라는 간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편 9편은 단순히 이미 끝난 승리를 기념하는 노래만이 아닙니다.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악과 고난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표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의 정확한 뜻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특정한 곡조나 음악적 지시어로 보고, 어떤 이들은 “아들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뜻을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분명한 것은 이 시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9편은 시편 10편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전개되는 흔적이 있으며, 두 시편이 원래 하나의 긴 시였을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편 9편이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셨다는 찬양에 가깝다면, 시편 10편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라고 탄식하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9편을 읽을 때도 우리는 단순한 승리감만이 아니라, 악이 여전히 현실 속에 남아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붙드는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9편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악인은 자기 손으로 행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나라들은 스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시고, 압제받는 자의 피난처가 되시며,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시편은 성도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

시편 10편 강해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도입: 시편 10편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드리는 믿음의 탄식입니다 시편 10편은 매우 현실적인 시편입니다. 시편 9편이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라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찬양했다면, 시편 10편은 곧바로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 질문은 신앙 없는 사람의 냉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현실의 악 앞에서 느끼는 깊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고, 교만한 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가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멀리 계신 것처럼 보입니까? 왜 환난 때에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까?” 시편 10편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 언어를 줍니다. 신앙은 고통스러운 질문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묻는 탄식을 허락합니다. 다만 그 질문은 하나님을 떠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질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탄식입니다. 시편 10편의 특징은 악인의 내면과 행동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한다는 점입니다. 악인은 교만합니다. 가난한 자를 박해합니다. 탐욕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보지 않는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자처럼 숨어 있다가 힘없는 자를 잡고, 자기 그물로 가난한 자를 끌어갑니다. 시편 기자는 악을 막연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심리, 언어, 행동, 사회적 폭력까지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2절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

시편 8편 강해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도입: 시편 8편은 밤하늘 아래에서 드리는 인간 존재의 찬양입니다 시편 8편은 시편 앞부분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시편 3편부터 7편까지는 대체로 탄식과 고난, 원수의 공격, 억울함,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8편에 오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다윗은 더 이상 원수의 위협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달과 별을 바라봅니다. 창조 세계의 광대함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작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세우셨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시편 8편은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고백은 1절과 9절에 반복됩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찬양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는 포괄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8편 전체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답다”는 고백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존귀도,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도, 하늘의 영광도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시편 8편의 핵심 질문은 4절에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질문은 인간의 초라함에서 나온 절망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교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고, 그 작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경외의 질문입니다. 시편 8편은 인간론의 중요한 본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앉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과 같은 존재로 축소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은 작지만 존귀합니다. 약하지만 영광을 받았습니다.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뜻을 맡은 ...

시편 7편 강해 의로우신 재판장

  의로우신 재판장 도입: 시편 7편은 억울한 사람의 법정 기도입니다 시편 7편은 억울한 고발과 비방 속 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표제는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다윗의 식가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식가욘”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격정적이고 탄식이 섞인 시적 노래, 혹은 특별한 음악적 형식을 가진 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가 차분한 묵상이라기보다 억울함과 호소, 자기 성찰과 심판 요청이 함께 담긴 매우 격렬한 기도라는 점입니다. “베냐민인 구시”가 누구인지는 성경 본문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울 왕가와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다윗은 사울의 오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해치려 하지 않았지만, 사울과 그 주변 사람들은 다윗을 반역자처럼 몰았습니다. 시편 7편은 바로 그런 상황, 곧 하지 않은 죄로 고발당하고, 충성했음에도 배신자로 몰리며, 악한 말의 공격을 받는 상황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7편은 일종의 법정 기도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재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판정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께 피하고, 자신을 쫓는 자들에게서 건져 달라고 구합니다. 이어서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합니다.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까닭 없이 원수 된 자를 약탈하였다면 원수가 나를 짓밟아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의를 과시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직하게 내어놓는 무죄 호소입니다. 그 후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 심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세우시고 악인의 악을 끊으십니다. 마지막에는 악인이 자기 꾀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인이 웅덩이를 팠지만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그의 재앙이 자기 머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