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공의의 보좌
공의의 보좌
- 도입: 시편 9편은 감사와 탄원이 함께 흐르는 시편입니다
시편 9편은 다윗의 감사시이면서 동시에 탄원시입니다. 앞부분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 악인의 횡포, 하나님께 다시 일어나 달라는 간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편 9편은 단순히 이미 끝난 승리를 기념하는 노래만이 아닙니다.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악과 고난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표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의 정확한 뜻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특정한 곡조나 음악적 지시어로 보고, 어떤 이들은 “아들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뜻을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분명한 것은 이 시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9편은 시편 10편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전개되는 흔적이 있으며, 두 시편이 원래 하나의 긴 시였을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편 9편이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셨다는 찬양에 가깝다면, 시편 10편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라고 탄식하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9편을 읽을 때도 우리는 단순한 승리감만이 아니라, 악이 여전히 현실 속에 남아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붙드는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9편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악인은 자기 손으로 행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나라들은 스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시고, 압제받는 자의 피난처가 되시며,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시편은 성도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불공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거짓된 사람이 성공하며, 약한 사람의 목소리가 묻히고, 의로운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시편 9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모든 인생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시편 9편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בְּכָל־לִבִּי, 베콜 리비입니다. “나의 온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음, לֵב, 레브는 단순한 감정의 장소가 아닙니다. 생각, 의지, 판단, 사랑, 결단을 포함하는 인격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잠깐 고마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감사는 부분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입술로는 감사하지만 마음은 불평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감사하지만 삶의 자리에서는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심으로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감사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상황이 완벽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여기서 “기이한 일들”은 נִפְלְאוֹת, 니플라오트입니다. 놀라운 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놀라운 역사를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삶과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침묵하지 않고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감사는 기억과 증언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으면 감사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기억한 은혜는 전해져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 마음속으로만 감사하지 않습니다. 주의 기이한 일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은 개인적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증언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의 삶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는 증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2절: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2절은 감사가 기쁨과 찬양으로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쁨의 대상입니다. 다윗은 단지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물러간 상황만을 즐거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주를” 기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건강, 회복, 승리, 응답, 보호, 공급은 모두 감사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가장 깊은 기쁨은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선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계시고, 상황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존하신 주의 이름”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지존하신”은 עֶלְיוֹן, 엘리온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 모든 권세 위에 계신 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권력보다 높으시고, 나라들의 흥망보다 높으시며, 악인의 위협보다 높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지존하신 분으로 찬양합니다.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신실하시고, 인자하시며, 공의로우십니다. 다윗은 그 이름을 찬송합니다.
오늘 우리가 찬양할 때도 단순히 음악적 감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내가 어떤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찬양하고 있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시편 9편은 찬양의 중심이 하나님 자신임을 가르쳐 줍니다.
3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3절은 감사의 구체적 이유를 말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다윗은 원수들이 물러가고 넘어져 망한 일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기 힘으로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은 “주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군사적 승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루어진 심판입니다.
“주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 앞, 하나님의 임재 앞이라는 뜻입니다. 악인은 사람 앞에서는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말과 권력과 폭력으로 사람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설 수 없습니다. 시편 1편에서도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5편에서도 오만한 자들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9편에서도 원수들은 주 앞에서 넘어집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큰 위로입니다. 내가 악인을 이길 힘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 견디지 못합니다. 성도의 소망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공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악인은 물러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개인적 복수의 감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다윗의 기쁨은 원수가 고통당하는 것을 잔인하게 즐기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악이 물러간 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성도는 악인의 회개를 바라야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악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무너지는 것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4절: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습니다
4절은 하나님을 변호자와 재판장으로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다고 말합니다. “송사”는 법정적 언어입니다. 다윗은 억울한 고발과 대적의 공격 속에서 하나님께 자기 사건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건을 변호하셨습니다.
“나의 의”라는 말은 다윗이 절대적으로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보여 주듯 다윗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건, 특정한 원수의 고발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함과 정당함을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말만 듣지 않으시고 실제 진실을 판단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것은 시편 9편의 중심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보좌는 왕권과 재판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뒤편에서 무관심하게 관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고 심판하십니다.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제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일부만 알고 판단합니다. 감정과 이해관계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외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과 동기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이 말씀은 억울한 성도에게 큰 위로입니다. 사람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의도와 진심이 왜곡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십니다. 반드시 내 방식과 내 시간에 해명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5절: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셨습니다
5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개인적 원수만이 아니라 열방과 악인 전체를 향함을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세력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2편에서 열방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했습니다. 시편 9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런 열방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악인을 멸하시며.” 하나님은 악을 추상적으로만 다루지 않으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악을 지속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존재와 명예와 기억을 의미합니다.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명예가 무너지고, 존재의 흔적이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도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름은 영원히 남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헛된 영광을 경고합니다. 하나님 없는 이름,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운 명성, 악으로 쌓은 권력은 결국 지워집니다. 아무리 시대를 흔들었던 제국도 사라지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세자들도 무너집니다.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이름만이 참으로 남습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크게 남기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6절: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6절은 악인의 파괴적 성취가 결국 무너짐을 말합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원수는 성읍들을 무너뜨렸을 수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삶을 짓밟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끊으셨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남긴 파괴의 흔적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라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봅니다. 악인은 자신이 영원히 남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성읍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악인의 권세는 끝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너뜨린 성읍보다 그들의 이름이 먼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기억할 수 없나이다”라는 표현은 심판의 완전성을 보여 줍니다. 악인의 영화와 폭력적 업적은 결국 잊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영원한 기억을 얻지 못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십니다. 시편 9편은 기억의 역전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기억하고 약한 자를 잊지만, 하나님은 악인의 이름을 지우시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십니다.
7절: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7절은 악인의 멸망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악인은 끊어지고 이름은 지워지지만, 여호와께서는 영원히 앉으십니다. 여기서 “앉으심”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말합니다. 인간 왕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제국은 등장했다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시편 9편의 가장 중요한 위로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일시적입니다. 악인의 성공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시대의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지나가는 권력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하나님은 보좌를 심판을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도덕적 혼돈에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판단이 있습니다. 선과 악이 최종적으로 구별됩니다. 억울함과 폭력이 영원히 묻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심판이라는 말을 불편해하지만, 심판 없는 세상은 피해자에게 절망입니다. 만약 최종 심판이 없다면 억울한 자의 눈물은 어디서 갚음을 받습니까? 역사 속의 수많은 폭력과 거짓과 학대는 어디서 바로잡힙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진리이지만 동시에 정의를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입니다.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8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말합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하나님은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십니다. 히브리어 צֶדֶק, 체데크는 의, 공의, 바른 질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으십니다. 힘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정직으로”는 מֵישָׁרִים, 메샤림입니다. 곧음, 바름, 공평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굽지 않습니다. 왜곡되지 않습니다. 인간 법정은 증거가 부족하거나 권력에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정직합니다.
“세계”와 “만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 보편적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특정 민족만의 지역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재판장이십니다. 모든 사람, 모든 나라, 모든 시대가 하나님의 판결 아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바라보게 합니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면서 심판주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여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억울함을 아십니다. 둘째,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과 행위도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고, 동시에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9절: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십니다
9절은 하나님의 공의가 약한 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하나님은 단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심판자만이 아닙니다. 그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십니다. “압제를 당하는 자”는 억눌린 사람, 짓밟힌 사람, 힘 있는 자들에게 밀려난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요새”는 מִשְׂגָּב, 미스가브입니다. 높은 곳, 안전한 피난처, 방어가 가능한 장소를 뜻합니다. 위험할 때 올라가 숨을 수 있는 견고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때의 요새입니다. 환난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환난 때 피할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목회적으로 매우 깊은 위로입니다. 압제를 당하는 사람은 대개 말할 곳이 없습니다. 힘 있는 사람의 말은 크게 들리고 약한 사람의 말은 묻힙니다. 억울해도 증명하기 어렵고, 상처받아도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제받는 자의 요새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교회도 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사교장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억눌린 자, 상처 입은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가 하나님의 요새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압제받는 자의 요새라면, 하나님의 백성도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공의와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10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합니다
10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뢰의 관계를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정보를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격적으로 알고 경험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여기서 “의지하다”는 בָּטַח, 바타흐입니다. 신뢰하다, 기대다, 안전하게 맡기다는 뜻입니다.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의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왜곡해서 알면 잘못 의지하거나 쉽게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주를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편 9편에 따르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고, 압제받는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때의 피난처이시고,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 이름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찾다”는 דָּרַשׁ, 다라쉬입니다. 구하다, 찾다, 간절히 묻다, 예배적으로 찾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즉시 원하는 모든 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응답이 늦어 보일 수 있고, 방식이 예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아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버림받지 않는 궁극적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보입니다.
11절: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라
11절은 공동체적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다윗은 혼자 감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향해 찬송하라고 초대합니다. “너희는 찬송하라.”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공동체적 찬양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을 나타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산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재판장이시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하나님의 행사는 숨겨 둘 것이 아닙니다. 선포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포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은혜와 공의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하는 공동체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시 말하는 자리입니다. 설교는 인간의 생각을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성도의 간증도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십니다
12절은 하나님이 억울한 피를 잊지 않으심을 말합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라는 표현은 매우 강력합니다. 하나님은 피 흘림을 조사하십니다. 억울하게 흘린 피, 폭력으로 희생된 생명, 힘없는 자가 당한 고난을 하나님은 심문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피 흘림은 심각한 죄입니다. 살인뿐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폭력, 억압, 착취, 학대도 하나님 앞에서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 흘림을 심문하십니다.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하나님은 피해자를 기억하십니다. 세상은 강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약자의 눈물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이름을 지우시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십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힘없고 낮아지고 압제받는 자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압제받는 자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은 동시에 교회를 향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약자의 고통에 무감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예배와 정의, 찬양과 긍휼이 함께 가야 합니다.
13절: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3절부터 다윗은 다시 개인적 탄원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찬양하던 다윗은 이제 다시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이 시편 9편의 현실성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이 있습니다. 이미 감사할 이유가 있지만, 아직 기도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고난 중에 있습니다. 이미 은혜를 경험했지만 계속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다윗은 다시 חָנַן, 하난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한 사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자기 삶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사망의 문은 죽음의 경계, 절망의 문턱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음에 가까운 자리에서 하나님께 일으킴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의 연장만이 아니라 절망에서 건져 올리는 구원의 이미지입니다.
신약의 빛에서 이 표현은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도 사망의 문이 끝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나의 고통을 보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 보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관계의 언어입니다. “주님, 제 고통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제 아픔을 보아 주십시오.” 하나님께 고통을 보아 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의 특권입니다.
14절: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4절은 구원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이 구원을 구하는 이유는 단지 살고 싶어서만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찬송을 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면, 그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조가 아름답습니다. 13절에는 “사망의 문”이 있고, 14절에는 “딸 시온의 문”이 있습니다. 사망의 문에서 건짐 받은 자가 시온의 문에서 찬양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예배의 문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딸 시온”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다윗은 개인적 구원이 공동체적 찬양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시면, 나는 공동체 가운데서 주의 구원을 찬양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기도의 목적도 여기서 배웁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 자체만을 위해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기도는 “나를 건지셔서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로 나아갑니다. 병에서 고쳐 주시면 내 몸으로 주를 섬기겠습니다. 절망에서 건져 주시면 주의 구원을 증언하겠습니다. 억울함에서 일으켜 주시면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겠습니다.
구원은 찬양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지신 사람은 침묵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문에서 시온의 문으로 옮겨진 사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15절: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15절은 악인의 자기 파괴를 다시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이 구절은 시편 7편의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 악인이 웅덩이를 파지만 자신이 빠집니다. 그물을 숨기지만 자기 발이 걸립니다. 악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인의 계획을 그대로 돌려보내십니다. 남을 무너뜨리려고 만든 계략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거짓으로 이익을 얻으려던 사람이 거짓 때문에 무너집니다. 폭력으로 권세를 잡으려던 사람이 폭력의 논리에 먹힙니다.
성도는 이 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즉시 바로잡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악의 자기 파괴성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작동합니다.
16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16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실 때, 세상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악인의 손이 결국 자신을 묶습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속박을 낳습니다. 거짓은 상황을 풀어 줄 것 같지만 더 복잡하게 얽어맵니다. 악한 선택은 처음에는 유리해 보이지만 결국 자기 영혼과 삶을 묶어 버립니다.
여기서 시편은 “힉가욘, 셀라”라는 음악적·묵상적 지시어를 덧붙입니다. “힉가욘”은 묵상, 낮은 울림, 깊은 생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셀라”는 멈춤과 묵상을 암시합니다. 이 지점에서 멈추라는 것입니다. 악인이 자기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는 현실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죄의 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17절: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갑니다
17절은 악인의 최종 운명을 말합니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스올”은 죽음의 영역, 무덤, 사망의 세계를 뜻합니다. 악인들은 스올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인간의 죽음과 심판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악인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 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 악인의 본질은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개인과 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갑니다.
성경에서 기억과 망각은 매우 중요한 영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을 잊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언약을 기억하고, 율법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으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빠졌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문화는 인간을 절대화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경제는 탐욕을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정치권력은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개인은 자기 욕망을 법으로 삼습니다. 시편 9편은 하나님을 잊은 길의 끝이 스올이라고 경고합니다.
18절: 가난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18절은 악인의 운명과 대조적으로 약한 자의 소망을 말합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에서는 궁핍한 자가 쉽게 잊힙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는 약합니다. 권력과 돈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크게 들리지만, 약한 자의 고통은 자주 묻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궁핍한 자를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항상”과 “영원히”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잊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실망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은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의 소망은 세상의 구조 안에서는 자주 꺾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히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사회적 약자에게 위로를 주는 동시에 교회에 책임을 줍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신다면, 교회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공한 사람만 환영하는 곳이 아니라, 궁핍한 자가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달라야 합니다.
19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소서
19절은 다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사”라고 기도합니다. 악이 여전히 현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했지만, 여전히 다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성도의 삶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하셨고, 이미 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서 “인생”은 연약한 인간을 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승리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악한 인간 권세가 최종 승리자가 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인간의 교만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없는 권력이 성공하고, 하나님을 잊은 나라들이 번영하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합니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소서.” 최종 승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모든 나라는 주 앞에 서야 합니다. 개인만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과 권세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성경적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나라들의 길도 보십니다.
20절: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자기가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마지막 20절은 시편 9편의 장엄한 결론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 구절은 시편 9편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인간 교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처방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히브리어 אֱנוֹשׁ, 에노쉬입니다. 시편 8편 4절에서도 “사람이 무엇이기에”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에노쉬는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강조합니다. 시편 8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런 연약한 인간을 기억하시고 존귀하게 하신다는 은혜가 강조되었습니다. 시편 9편에서는 하나님을 잊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경고가 강조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이 인간일 뿐임을 잊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 할 때 교만이 시작됩니다. 권력자가 자기 권세를 절대화할 때 폭력이 시작됩니다. 나라가 자기 힘을 신격화할 때 압제가 시작됩니다. 개인이 자기 욕망을 최종 법으로 삼을 때 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두렵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자리를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참된 경외는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인간은 괴물이 됩니다.
시편 9편의 마지막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기도입니다. “주님, 우리가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권력과 지식과 성공과 계획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하소서.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소서.”
시편 9편의 전체 흐름: 감사에서 공의로, 공의에서 겸손으로
시편 9편은 전심의 감사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고,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음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이어 다윗은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앉으시고,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이 공의로운 하나님은 압제받는 자의 요새이고, 환난 때의 피난처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합니다.
그다음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은혜를 구합니다. 사망의 문에서 일으켜 주시고,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악인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하나님을 잊은 나라들은 스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궁핍한 자는 항상 잊히지 않고, 가난한 자의 소망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셔서 인생이 자기가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흐름은 성도의 신앙을 균형 있게 세웁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동시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해야 합니다. 동시에 약한 자의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피난처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리적 핵심: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시편 9편의 가장 중요한 교리적 중심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만민에게 정직으로 판결하십니다.
이 교리는 현실의 불의를 견디는 성도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계시지 않다면 세상은 우연과 폭력의 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좌에 계시기 때문에 악은 최종적으로 승리하지 못합니다. 억울함은 영원히 묻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은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악인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공의의 보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보좌이기도 합니다.
교리적 핵심: 하나님은 약한 자를 기억하십니다
시편 9편은 하나님께서 압제받는 자의 요새가 되시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높은 자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하나님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소외된 자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힘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열립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약한 자의 부르짖음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가 권력과 성공의 언어만 말하고,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의 소리를 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교리적 핵심: 하나님을 잊는 것이 악인의 본질입니다
시편 9편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을 말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합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감사가 사라지고, 경외가 사라지고, 책임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은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잊습니다. 그때 교만이 자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내가 피조물임을 알고, 내 생명이 은혜임을 알고, 내 힘이 제한적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기억의 훈련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찾고,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기억이 신앙을 지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읽기: 공의와 구원이 만나는 십자가
시편 9편은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는 어떻게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참으로 엄중하다면, 우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대가를 그리스도께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사망의 문에서 일어나신 분입니다. 다윗은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의 문을 통과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죽음의 문 앞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의 참 피난처이십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그는 죄인과 약한 자를 부르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시편 9편의 요새 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시편 9편의 공의는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은 공의로 심판받고, 악은 완전히 끊어지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영원한 기쁨에 들어갈 것입니다.
강해적 적용: 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시편 9편은 전심의 감사로 시작합니다. 성도는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건지셨는지, 어떤 은혜로 붙드셨는지, 어떤 죄에서 돌이키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는 기억의 열매입니다. 망각은 불평을 낳고, 기억은 감사를 낳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어 보십시오. 그리고 전하십시오. 감사는 입술로 고백될 때 더 깊어집니다.
강해적 적용: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불공정한 일을 당할 때,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악인이 강해 보일 때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영원히 앉아 계십니다. 심판을 위해 보좌를 준비하셨습니다.
성도의 안정은 세상 질서의 안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옵니다. 세상 권력은 바뀌고, 사람의 평가는 흔들리고, 상황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강해적 적용: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 안의 약한 사람, 교회 안의 상처 입은 사람, 사회 속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말할 힘이 없는 사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을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부르짖음을 우리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강해적 적용: 하나님을 잊지 않는 삶을 훈련하십시오
악인의 길은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 기도, 예배, 감사 기록, 찬양,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내가 커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커지시고 나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불안과 교만이 자랍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겸손과 신뢰가 자랍니다.
강해적 적용: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아십시오
시편 9편의 마지막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 기도는 남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내 힘과 지혜는 제한적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사람은 교만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내가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피조물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참 평안의 시작입니다.
결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시편 9편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는 찬양으로 시작하여, 인간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감사하고, 자신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그는 세계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만민에게 정직으로 판결하십니다. 그는 악인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며, 하나님을 잊은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압제받는 자의 요새이시고, 환난 때의 피난처이시며,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불공정해 보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악인이 강해 보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악인은 자기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힙니다. 약한 자의 부르짖음이 묻힌 것 같아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잊으면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 겸손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게 하소서.
주의 모든 기이한 일을 전하게 하소서.
주의 보좌를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압제받는 자의 요새가 되시는 주를 의지하게 하소서.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는 주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로 우리가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고 시온의 문에서 찬양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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